김한수 문화부 차장

몇년 전 군대 시절 고참을 만났을 때였다. 한참 소주잔을 기울이며 '군대에서 축구 하던' 그 시절로 빠져가다가 그가 툭 하고 다른 이야기를 던졌다.

분대원이었던 내 잘못 때문에 분대장인 그가 완전군장으로 연병장을 '뺑뺑이'돌았다는 거였다. 문제는 아무리 더듬어도 내 머릿속엔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아, 기억이란 이렇게 내가 편할 대로 편집될 수도 있구나' 하면서 미안해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게 한 건 11월 21일자 신문에 보도된 사건 기사였다. 만취한 상태에서 아내를 때려 숨지게 한 뒤 경찰에 직접 신고까지 한 50대 남성이 스스로 살인의 기억을 지우는 '기억 왜곡'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를 프로파일링(범죄심리 분석)한 경찰관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한다기보다 특정 상황만을 왜곡해서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고 말했다. 범죄나 사고 등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상황을 잊어버리거나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기억을 조작한다는 것이다. 거짓말탐지기에서도 진실 반응이 나올 정도로 스스로의 기억을 바꿔치기하는 비정상적 상태로 뇌가 리셋(reset)되는 것이다.

하루 뒤 신문 1면에 보도된 '일본 역사 시계 100년 전으로 유턴'이란 기사는 '기억 왜곡'에 '집단'을 더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다음 달 일본 총선에서 집권이 확실시되는 자민당의 극우 회귀 공약을 다룬 내용이었다. 자민당의 공약이란 것들은 어이없는 수준이다. 전쟁과 군대 보유를 금지한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일왕(日王)을 국가원수로 격상하겠다고 한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담은 역사 교과서는 '자학(自虐)사관 편향적'이므로 전면 개정하겠다고도 했다. 심지어 일본 정부가 스스로 조사를 벌인 후 위안부 강제 동원을 사죄한 고노 담화를 파기하는 것도 공약에 포함했다. 한마디로 과거사와 관련한 궤변과 망언을 죄다 모아놓은 완결편인 셈이다. "위안부가 (일본)군에 폭행·협박을 당해서 끌려갔다는 증거는 없다"(하시모토 도루 오사카시장) "(고노 전 관방장관이) 영문도 모르면서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을 인정해 한·일 관계를 망쳤다. 가난한 시대에 매춘은 이익 나는 장사였고 위안부가 장사를 선택한 것이다"(이시하라 도쿄도지사)…. 그동안 일본의 유력 정치인들이 늘어놓은 망언(妄言)은 이제 나열하기도 지칠 지경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일본의 과거사 부정 행태를 독일의 경우와 비교해 "과거를 망각한 국가·민족엔 미래가 없다"고 비판해왔다. 하지만 이젠 '망각'을 넘어 '기억 왜곡의 집단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모습이다. 지금 일본 정치인의 행태와 그들을 지지해 집권당으로 만들어주려는 유권자들을 보고 있자면 '어떤 사실을 잊어버림'이란 뜻의 '망각'이란 단어는 좀 더 정상적인 경우에나 사용해야 할 것 같다.

지난달 캄보디아에서 열린 한 포럼에서 킬링필드 시절의 자료를 수집하며 당시 역사를 연구하는 현지 NGO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기억은 항상 조작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교육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