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유로를 내고 베를린~파리 대륙횡단 버스를 타면 열댓 시간 걸린다. 해거름 베를린을 출발할 때는 버스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하다. 밤새 달려 동틀 때 버스 바퀴가 프랑스 국경선을 넘으면 차 안이 갑자기 왁자해진다. 승객은 대부분 같은 승객인데 믿을 수 없을 만큼 차 안 공기가 들뜬다. 떠들고 웃음소리가 터지고 팔 벌리는 제스처까지 커진다. 어깨를 으쓱 올리며 다들 한마디씩 한다. "프랑스 땅에 왔군."

▶서울대 심리학과에서 몇 년 전 감정을 드러내는 우리말 430개를 추렸다. '홀가분하다' '기쁘다' '반갑다'처럼 '쾌(快)'를 나타내는 말이 30%도 못 됐다. 대신 '역겹다' '억울하다' '비참하다' 같은 '불쾌(不快)' 표현이 72%였다. 상명대에서도 한국인이 많이 쓰는 감정 표현 관용구 500개를 살폈다. '가슴 저리다' '맥 빠지다' '끽소리도 못하다' 같은 말을 '마음 가볍다' '신바람 나다' 같은 표현보다 서너 배 많이 썼다.

▶미국 갤럽이 151개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감정을 드러내며 사는지 조사했다. 나라마다 어른 1000명에게 "어제도 존중받았나?" "어제 많이 웃었나?" "어제 재미있는 일을 했나?" 물었다. '고통·걱정·슬픔·스트레스·분노'가 어떤지도 들었다. 그랬더니 무뚝뚝한 나라 1위로 싱가포르가 꼽혔다. 잘사는 나라인데도 근무 만족도가 2%밖에 안 됐다. "학교에서 남과 다르게 행동하지 말라고 배워 감정 표현을 주저한다"는 분석이 따랐다.

▶중국 고전 '수호지'나 '금병매'에선 등장인물이 "분통 터져 죽겠다"고 말한 뒤 바로 쓰러져 죽는다. 그런 중국인도 '무뚝뚝 순위' 60위로, 감정을 웬만큼 드러내는 편이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철저하게 감정을 숨긴다는 일본인조차 80위로 나왔다. 한국인은 20위에 올라 일본인과 중국인보다 훨씬 더 감정을 감추고 무뚝뚝했다. 반면 활달하기로는 유럽과 중남미 라틴계가 두드러졌다.

▶인간은 얼굴 근육을 80개쯤 움직여 7000가지 표정을 짓는다. 웃을 때는 15개 근육을 쓰고, 찡그릴 때는 80개 거의 다 동원한다. 얼굴 근육을 한쪽 방향으로만 쓰면 주름이 생긴다. '10위권 경제 강국'이라고 그 순위만큼 행복한 건 아니다. 우리가 자주 쓰는 감정 표현 관용구는 '슬픔〉분노〉두려움〉기쁨〉미움〉사랑' 순인 데다 그나마 입 꾹 다물고 산다. 누구든 존중받고, 많이 웃고, 재밌게 좀 해달라. 요즘 한국인은 얼굴 근육을 너무 써 일그러질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