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의 히어로 & 히로인] [35] '왼쪽 눈꺼풀'만으로 세상을 끌어안기

조선일보
  • 정이현 소설가
    입력 2012.11.07 23:30

    여기 두 문장이 있다. 1번, 왼쪽 눈을 천천히 껌뻑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2번,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왼쪽 눈은 천천히 껌뻑일 수 있다. 이것은 실화다. 영화 '잠수종과 나비(Le scaphandre et le papillon)'의 주인공 장 도미니크 보비(마티유 아말릭)는 세계적 패션 잡지 '엘르'의 프랑스어판 편집장이었다. 삶은 화려했고 사람들은 그를 동경했다. 그는 언제나 바빴고 활기찬 인생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 의식은 돌아왔으나 몸은 움직일 수 없었다. 뇌졸중에 따른 감금증후군(뇌의 명령을 몸이 인식하지 못하는 병)이라고 했다. 아니다. 몸의 딱 한 곳만은 움직일 수 있었다. 불행이라고 할까, 다행이라고 할까. 그곳은 왼쪽 눈꺼풀이다.

    '잠수종과 나비'… 줄리앙 슈나벨 감독, 마티유 아말릭·엠마누엘 자이그너 주연, 112분, 프랑스·미국, 2007년.
    여느 지식인처럼 성격이 냉소적인 보비는 처음에 1번을 고른다. 세상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유일하고 희미한 창구에 대해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바람은 오로지 하나였다. 눈 깜빡임으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준 언어 치료사에게 처음으로 한 말이 바로 그것이다. "죽고 싶다."

    그러고 나서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느냐고? 그러지 않았다. 그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인간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 아니 현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기에 그런다. 여자를 좋아하는 성격도 그대로이고 익살스러운 본성도 남아있다. 그는 대단히 절망적으로 변하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가망 없는 희망을 노래하지도 않는다. 보비는 장애를 진심으로 극복하고 일어서는 인간 승리의 주인공도 아니고, 신(神)에게 구원받는 기적의 주인공도 아니다. 대신 그는 환상의 세계를 개척한다. 종(鐘) 모양의 잠수복인 잠수종을 입고 심해(深海)로 들어가고, 어디든 팔랑이며 부유하는 나비의 시선으로 하늘을 날아다닌다.

    그는 그저 나약하고 평범한 한 인간에 불과하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하필이면 불운하게 그에게 벌어졌을 뿐이지만, 그가 침대에 누운 채 하루에 반쪽 분량씩 15개월 동안 20만 번 이상 왼쪽 눈을 깜빡거려 완성한 진솔한 병상 일기는 인간이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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