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우익에 맞서… 어느 日 스님의 외로운 싸움

입력 2012.11.07 03:01 | 수정 2012.11.07 23:17

운쇼지 이치노헤 주지 - 일제의 죄 참회한 참사문碑 日 우익들 "철거하라" 위협
종단마저 압력에 물러섰지만 "잘못을 사죄하지 않는다면 더이상 석가의 제자 아니다"

3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조동종 측이 보내온 참사문비 철거 요구 내용증명에 대해 설명하는 이치노헤 스님. 스님의 정장은 일본 조동종 스님의 공식 외출복이다. /요코하마=이태훈 기자

“정말 그렇게 한국에 아부하면서 사죄하면 기분 좋은가. 이해할 수 없다. 자손들에게까지 선조들의 죄를 뒤집어 씌워 영원히 사죄하는 수모를 당하게 할 셈이냐. 일본이 인프라를 정비시켜준 덕에 지금의 한국이 있는 것 아니냐. 왜 그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은혜를 모르나.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사죄할 필요 없다. 그 비석은 빨리 철거하라…”

일본 아오모리(靑森) 운쇼지(雲祥寺) 주지 이치노헤 쇼고(一戶彰晃·63) 스님은 지난달 이같은 내용의 익명의 편지를 받았다. 이치노헤 스님은 일본 내에서 인권ㆍ평화 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 지난 9월 16일 전북 군산시 동국사에 자신이 속한 일본 불교 조동종이 일제 강점기 저지른 죄를 참회하는 ‘참사문’(懺謝文ㆍ참회와 사죄의 글)을 비석으로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본지 8월17일자 A23면 보도>

그는 지금 일본내 우익의 위협과, 이런 위협을 두려워하는 종단의 비석 철거 요구에 맞서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3일 밤 일본 요코하마에서 만난 스님은 “참사문은 조동종 ‘양심’의 요체다. 알에서 병아리가 나오려면 어미새가 알껍질을 쪼아 줘야 하는 것처럼, 일본과 일본 불교에게는 이런 진정한 참회가 필요하다”며 “어렵게 만들어진 참사문과 참사문비의 의미를 지키기 위해 나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우익 압력에… 조동종, “철거 요구” 내용증명

일본 우익이 참사문비 문제로 들끓기 시작한 것은 지난 9월초 한국 언론 보도를 통해 ‘참사문비 제막식에 조동종 종단 재무부장 스님이 참석할 수 있다’고 전해지면서부터. 보도 뒤 사흘간 종단에 “이치노헤를 파문하라” “참사문비 제막을 취소하라”는 항의 전화 80여통이 쏟아졌다. 비슷한 내용을 담은 익명의 편지들도 밀려들었다.

항의와 위협이 익숙치 않은 일본사회에서, 종교단체에 대한 이런 항의는 커다란 위협이었다. 종단 측은 결국 같은달 12일 홈페이지에 게시했던 참사문을 삭제했다. 이 글은 한 달 반이 지난 10월말에야 복구됐다.

이치노헤 스님은 “종단은 지난 9월 14일자로 ‘저작권이 종단에 있는 글을 무단으로 편집해 썼으니 철거해 종단으로 반환하라’는 내용증명을 보내왔다”며 “매년 신도들과 함께 서울 조계사 연등행렬에 참여해온 종단 재무부장 스님은 이번 일이 주원인이 돼 연임하지 못하고 종단 지도부에서 물러났다”고 했다.

특히 이 내용증명은 우익의 부당한 압력을 종단이 사실상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이다. 본지는 조동종 측에 팩스로 답신 이메일·전화번호를 기재한 취재요청서를 보냈으나 답변을 얻지 못했다.

◇“잘못은 사죄하는 것이 석가 제자의 도리”

이치노헤 스님은 “종단이 20년전 참사문을 공식 입장으로 펴냈고, 이후 조선인 강제징용자 유골 반환 운동 등에 참여해왔다. 참사문비 철거 요구는 이런 과거의 노력마저 부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참사문비 건립은 이미 올해 초 종단 내부 기구 검토를 거쳐 별다른 결론없이 넘어갔던 사항”이라고도 했다. 이미 도쿄신문 등 일본 언론들도 이번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며 보도와 취재를 하고 있다.

스님은 지난 2010년 중국 난징대학살 과정에서 조동종의 역할을 파헤친 책 ‘조동종의 전쟁’을, 지난 7월말엔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조동종 활동을 밝혀낸 책 ‘조동종은 한국에서 무엇을 했나’를 펴냈다.

스님은 “나는 조동종 소속 승려이기 전에 석가모니 부처의 제자이고, 그른 것을 그르다 말하고, 잘못한 것은 사죄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석가의 제자라 할 수 없다”고 했다.

“불교는 평화와 공존을 추구하는 실천적 종교이고, 우리 종단의 참사문과 참사문비는 매우 귀중합니다. 조동종은 우익의 부당한 요구에 당당히 맞서고, 참사문비 철거 요구도 철회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일생을 바친 조동종이 불교 종단으로서 한 단계 성장하고, 한 발 더 앞으로 나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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