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통영에 기반을 둔 소규모 출판사 남해의봄날은 지난 15일 신간 '나는 작은 회사에 다닌다'(김정래·전민진 글)를 냈다. 모두가 대기업 입사를 꿈꾸는 세상에 당당히 반기를 든 젊은이 13인을 심층 인터뷰한 이 책은 별다른 홍보 없이도 꾸준한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다. 예스24·반디앤루니스 등 주요 온라인서점은 이 책을 일찌감치 '추천도서'에 올렸고, 모 대형 서점에선 이 책을 활용한 공동 이벤트 기획을 출판사 측에 제안하기도 했다.

아직 '주류(主流)'로 보긴 어렵지만 '명문대-대기업' 조합을 스스로 깨뜨리는 젊은이는 의외로 많다. 이 같은 현상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학벌(간판) 지상주의'를 기분 좋게 배반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맛있는공부는 실제로 남부럽잖은 스펙을 갖고도 작은 회사를 택한 세 젊은이를 만나 그들의 얘기에 귀 기울였다.

(왼쪽부터)최준희, 김민선, 이광진씨.

최준희|디자인데크 근무(서울대 서양화과 졸)

예원학교 실기 수석 졸업, 서울예고 수석 입학(이상 1993), 서울대 미술대학(서양화 전공) 졸업(2001), 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 석사학위 취득(2003)…. 최준희(35)씨의 이력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엄친딸(엄마 친구 딸)'이란 말이 절로 떠오른다. 그는 직원 수가 10명도 채 안 되는 환경디자인 전문 기업 디자인데크 경관계획팀에서 차장으로 재직 중이다. 입사 연도는 지난 2010년.

"예전부터 제 예술적 감수성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기왕이면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저만의 가치를 찾고 싶었습니다. 대학원에서 환경조경학을 선택한 것, 졸업 후 관련 업무를 다루는 회사에 들어간 것 역시 그 때문이죠."

최씨가 꼽는 '작은 회사의 장점'은 "의욕적으로 일하면 비교적 빨리 조직의 핵심 인재가 될 수 있다"는 것. 실제로 그는 지난해부터 1년간 붙들고 있던 대형 프로젝트를 끝낸 후 과감하게 '1개월 휴가'를 신청했다. 회사 내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물론 작은 회사에서 근무할 때 유의해야 할 점도 있다. "작은 회사일수록 안정성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해요. 따라서 입사를 결심하기 전 그 회사의 사업적 역량이나 비전을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 역시 이 회사에 들어오며 대표의 이상과 성향을 살폈죠. 다행히 '사회에 기여하는 일을 한다' '양(量)보다 질(質)을 추구한다' 등의 방향성이 저와 잘 맞았어요."

김민선|7321디자인 근무(홍익대 경영학과 졸)

"TV 홈쇼핑 방송을 볼 때마다 제품 자체보다 그 제품의 유통 과정이 궁금했어요.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 모든 과정을 책임지는 사람이 MD(Merchandiser)란 걸 알았죠."

김민선(26)씨는 대학 2학년 때부터 줄곧 MD를 꿈꿔 왔다. 그의 직장은 '어린왕자' '도로시' 등 복고풍 일러스트레이션을 다루는 문구 업체 7321디자인. 지난 2009년 6월 이곳에 입사해 직영 온라인몰 MD로 근무하고 있다. 그는 대학 시절 토익(TOEIC) 860점, 금융기업 인턴 근무 등 무난한 이력을 쌓았다. 대학 동기들도 대부분 대형 금융회사 등에 입사했다.

김씨가 작은 회사를 선택한 건 "내 의견이 곧바로 적용되는 조직 체계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작은 프로젝트 하나를 진행할 때도 정해진 절차를 모두 밟아야 하더라고요. 저처럼 경력이 짧은 새내기 직장인에겐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죠. 하지만 여기서 전 꽤 비중 있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벤트를 하나 진행할 때도 타이틀 결정부터 기간과 사은품 선정, 디자인 레이아웃 등 여러 부분에서 제 의견이 반영되죠. 그래서 좀 더 즐겁게, 책임감 갖고 일하게 돼요."

그는 "작아도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는 회사를 택하면 본인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광진|다다무역 근무(건국대 국제무역학과 졸)

"까끌까끌한 이 재질은 시폰(chiffon)이고 부들부들한 이 감촉은 시디시(CDC)입니다. 비치는 정도를 보니 이 원단은 10MM(momme·실크 중량을 재는 단위), 저 원단은 16MM이네요."

내년 2월 대학 졸업을 앞둔 이광진(26)씨는 지난 8월 다다무역 해외영업파트 수습사원이 됐다. 이후 두 달여간 매일 실크(silk) 원단을 만지며 일한 덕분에 이젠 여성용 드레스만 보면 소재·가격·무게 등을 줄줄이 읊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다다무역은 원단을 사들여 패턴(무늬)을 찍은 후 해외에 수출하는 중견 무역 업체. 직원 수는 30명 남짓이다.

이씨는 "전공을 살리고 관련 업무를 하루라도 빨리 익히고 싶어서" 작은 회사를 택했다. '소규모 회사일수록 직원 개개인이 맡게 되는 업무 범위는 넓을 것'이란 사실을 일찌감치 짐작한 것. 실제로 그는 입사 3주차부터 해외 바이어와 업무 메일을 주고받았다. 요즘은 국제전화로 품질 관리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그의 파트너는 대개 그보다 직급이 훨씬 높은 중견 간부들이다.

"대기업에 들어갔다면 지금쯤 전공 활용은커녕 간단한 업무 파악조차 하지 못해 버벅거렸을 거예요. 단기간에 전공 관련 실무를 몸소 체험하고 주도할 수 있는 지금 일에 매우 만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