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82] 절에서 술판 벌인 '新풍류남녀'

입력 2012.10.25 03:05

사찰에서까지 술판을 벌이는 일부‘풍류남녀들의 추태를 비판한 조선일보 삽화. 불상 옆에‘사쿠라 맥주’라는 간판이 보인다(1929년 4월 11일자).

"일요일 날쯤 되어 동대문 박게 잇는 어떠한 절이든지 마음대로 차저가 볼 것 가트면… 대법당 안에서까지 풍류남아(風流男兒)가 어엽분 미기(美妓)와 더부러 '부어라 마시어라!'의 코노래를 부르고 잇는 진긔한 장면까지도 간혹 볼 수가 잇슬 것이니…."

1929년 봄. 조선일보 사회면의 고발기사는 경악스러웠다. '질거운 봄으로부터 단풍이 고읍게 물드는 가을철까지' 행락철이면 서울 근교 일부 사찰에서 향락적 술판이 벌어지는 '못된 류행'이 번져 '염불 소리와 난봉가의 진기한 합주'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모처럼 불당을 차저 나갓든 선남선녀들은 넘우나 그 소란한 모양에 고만 넉을 일코' 발길을 돌리기까지 했다(1929년 4월 11일자). 일부 사찰의 향락적 놀이판은 1920년대 초부터 눈에 띄었다. 1926년엔 함남 석왕사에서 '풍기가 문란하여져서 눈으로 참아 보기 어려운 소인극(素人劇·아마추어의 연극)이 연출'되자 조선일보가 1면 칼럼으로 비판했다(1926년 8월 17일자).

사찰이 세속화하기까지는 여러 사정이 얽혀 있었다. 시대의 '모던한' 변화와 함께 확산된 요리집과 카페의 유흥 문화가 택시의 등장에 따라 경치가 아름다운 서울 근교 사찰로까지 옮아간 것이라는 측면도 있었다(서지영 '사찰과 유흥'). 불교가 더 많은 대중을 끌어들이려고 절의 문턱을 낮추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기도 했다. '음식은 료리집에서 먹고 세수는 이발소에서 하고 잠은 기생집에서 잔다는 소위 부랑자류'들은 '조곰 색다른 요정도락(料亭道樂)'을 찾아 절로 들어갔다(매일신보 1930년 4월 2일자). 욕망의 해방이 낳은 이 부작용을 당대의 잡지는 '승방(僧房)의 모던이즘'이라고 비꼬았다('조광' 1935년 11월호).

불교 중앙부는 1931년 고민 끝에 사찰 정화 운동을 벌이려고 했다(매일신보 1931년 4월 28일자). 그러나 그보다 먼저 총독부가 1935년 강력한 '사찰 정화(淨化)'를 선언했다. '기생의 절간 출입은 물론, 절에서 술을 판매하는 것'과 '절간의 유흥'이 모두 금지됐다(1935년 6월 5일자). 춘원 이광수(李光洙)는 칼럼에서 사찰 정화 조치를 언급하며 "사찰의 개왓장마다 찬 땀이 흐를 일"(1935년 6월 6일자)이라고 썼다. 당시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총독은 사찰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정화 조치를 하는 것이라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종교를 통해 시도된 일제의 황국신민화 및 내선일체 기획'(서지영)이라는 시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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