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중국 베이징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이 벌어졌다. 중국에서 투병 중 타계한 노로돔 시아누크 전 캄보디아 국왕을 추모하기 위해 시내 곳곳에 조기(弔旗)가 내걸린 것이다. 중국 국가를 상징하는 공간인 톈안먼(天安門)광장, 외교부 청사, 서우두(首都)공항 등 주요 지점에서 절반으로 내려 걸린 오성홍기(五星紅旗)를 만날 수 있었다. 사망한 외국 정상을 위해 중국에서 반기(半旗)가 걸린 것은 1994년 숨진 김일성 북한 주석에 이어 18년 만의 일이었다. 중국 국영 CCTV는 이날 시아누크의 시신이 서우두공항을 통해 중국을 떠나는 장면을 생중계하기까지 했다. 관영 환구시보(環球時報)는 이런 과도한 예우에 대해 "시아누크 같은 진정한 중국의 친구는 몇 안 된다"고 했다.
1922년생(生)인 시아누크는 강대국 외교에 능수능란한 인물이었다. 그는 1941년 19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당시 캄보디아를 지배하던 프랑스는 왜소한 체구에 늘 실없이 웃는 그를 만만하게 보고 국왕 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그는 신흥 강대국이었던 일본을 등에 업고 프랑스를 압박했고, 결국 1953년 완전 독립을 이뤄내는 데 성공했다. 캄보디아 국민은 그런 그를 '캄보디아의 혼(魂)'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독립 직후 한때 비동맹을 표방했던 시아누크는 인도차이나반도에 공산 혁명의 물결이 밀어닥친 1960년대 미국과 중국 사이를 오가는 외교를 구사했다. 1960년대 초반에는 비밀경찰을 동원해 폴 포트가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을 대거 숙청했고, 미국의 원조도 받아들였다. 그러나 1965년부터는 중국 쪽으로 돌아섰다. 베트남전 와중에 월맹에 캄보디아 동부 국경 안 거점을 제공했고, 그 대가는 컸다. 미군의 공습이 캄보디아로 확대됐으며, 1970년에는 외유 중 론놀 장군의 친미(親美) 쿠데타를 만나 중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시아누크는 1970~1980년대에는 공산권의 두 강대국인 중·소 사이에 낀 신세였다. 1975년 중국의 지원을 받는 크메르루주를 지지해 론놀 정권을 몰아내고 고국에 돌아왔지만 불과 4년 뒤인 1979년 소련을 배경으로 한 베트남의 침공을 받았다. 그는 다시 망명길에 올랐고, 캄보디아 내 각 정파가 내전 종식에 합의한 1991년에야 다시 귀국할 수 있었다. 시아누크는 미국과 옛 소련·중국·일본·베트남 사이를 오가는 다양한 줄타기 외교를 펼쳤다. 아마도 그것이 소국(小國) 캄보디아가 생존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크메르루주는 중국에서 수입한 마오이즘(Maoism)으로 무장하고, 국민 170만명을 대학살하는 '킬링 필드'를 자행했다. 거듭되는 침공과 내전 속에서 경제는 곤두박질쳤다. 지금은 많이 회복됐다지만 지난해 캄보디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여전히 1000달러가 되지 않는다.
캄보디아의 현대사가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는 것은 우리 역시 막강한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국가 지도자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전혀 다른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