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한림원이 지난주 발표한 201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중국의 작가 모옌(莫言)이다. 그의 이름이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장이머우(張藝謀) 감독, 궁리(鞏悧) 주연의 영화 '붉은 수수밭(紅高梁)'이 베를린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부터였다. 이 영화가 모옌의 연작 장편 '홍고량 가족' 중 제1부 '붉은 수수'를 원작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한 남자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나의 할머니 이야기이다." 어떤 할머니에게도 열아홉 살인 적은 있었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겠지만 1920년대 중국의 가난하고 어린 소녀에게 삶은 험난한 것이었다. 소녀 주얼(九兒·궁리)은 나귀 한 마리에 팔려 쉰 살 넘은 양조장 주인에게 시집을 간다.
그렇지만 그녀는 수동적인 운명의 희생자 역할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혼례 꽃가마를 멘 가마꾼(장원)의 건장한 몸을 훔쳐보고 야릇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친정 신행 가는 길에 그와 붉은 수수밭에서 뜨겁게 맺어진다. 남편이 급사한 뒤 일꾼들을 규합해 양조장을 적극적으로 꾸려가는 것도 그녀이고, 일본군에 저항하다 잔인하게 처형된 동료들의 복수를 강하게 주장하는 것도 그녀다. 야성적인 성격의 가마꾼과의 로맨스, 아들을 낳아 어머니로 사는 모습 등도 복합적으로 펼쳐진다.
주얼의 인생은, 봉건주의적 전통 아래 제 삶을 선택할 수 없었던 한 시골 소녀가 현실에 단념하거나 숙명에 순응하지 않고 붉은 수수처럼 강인한 생명력으로 맞서 이뤄낸 것이다. 항일운동의 한가운데에서 일본군의 총탄을 맞아 절명하는 장면으로 그녀의 일대기는 멈춘다. 마지막 순간의 목격자는 새로 결혼한 가마꾼 남편과 어린 아들이다.
이 이야기가, 손자가 들려주는 할머니의 생애였음을 상기하자. 세상 모든 이야기의 숨겨진 주인공은 결국 화자(話者)의 욕망이다. 주얼의 생(生)은 죽었으되 죽지 않고 그 아들의 아들의 목소리로 살아남았다. 봉건제 붕괴, 가부장제에 억눌렸던 여성의 해방,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 새로운 시대가 원하는 새로운 모성의 신화는 이렇게 완성되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