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싹 말린 프리지아에 불을 붙인 뒤 '꽃불꽃'이 자유낙하하는 풍경을 탐닉한다. 태워본 꽃은 최소 열 종류. 밤이면 자신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마구잡이'들과 '막무가내'들이 옥신각신 싸우며 불면의 탑을 짓는다. 185㎝와 62㎏의 숫자로 대표되는 불균형한 비율의 신체는 자주 통제력을 잃고 눈길과 빙판에서 넘어진다.
이 기이한 행적의 주인공은 소설가 정영문(47), 2012년 동인문학상의 주인공이다. 삶의 무의미와 허무를 유머로 극복하고 예술로 조롱하는 '한국의 베케트'. 수상작인 장편 '어떤 작위의 세계'(문학과지성사 출간)는 삶의 궁극적 무의미를 짧고 명쾌하며 위트와 우수가 넘치는 문장으로 빚은 '정영문 월드'의 결정판이다. 최근 몇 년 단편집 수상이 이어지던 동인상으로서는 2004년 김영하의 '검은 꽃' 이후 8년만의 장편 수상작이기도 하다.
그에게 수상 통보 전화를 걸었을 때는 오후 5시 무렵이었다. 거의 매일밤 '마구잡이'랑 '막무가내'와 싸운다는 이 불면의 작가는 "그 시각,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려고 침대에서 일어날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가, 전화를 받고 충격을 못이기고 다시 누웠다"고 했다. 동인상 작가, 정영문(47)의 일성(一聲)이었다.
―수상 통보 전화를 받았을 때의 상황은.
"그날도 아무런 의욕이 없어 하루를 별로 시작하고 싶지 않았고, 하루의 시작을 어떻게든 미루려 하며 침대에서 일어날까 말까 고민하던 상태였다. 소식 듣고 충격을 못 이기고 쓰러지는 척하며 다시 누웠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충격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일어났다. 만면에 미소라도 지어볼까 말까 하다가 웃기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동인상 단골후보였다. 3수(修)만의 수상. 소감은.
"한편으로는 담담했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을 해보았는데 그렇게 틀린 것 같지는 않았다. 다른 한편으론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내 주수입원은 번역이다. 예전에는 1년에 4~5권씩, 많을 땐 7~8권도 했다. 번역하는 기계처럼, 노예처럼 일했다. 그런데 우울증과 불면증이 심해졌고 4년 전부터 귀와 뇌를 잇는 혈관에 문제가 생겨 어지러움증이 심해져 번역을 거의 못했다. 지난 여름엔 '과연 이 여름을 넘길 수 있을까, 넘기지 말까' 싶을 정도로 몸이 안 좋았다. 경제적으로도 한계 상황에 이르러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번 상을 받았다. 나를 살려주었다고 속으로 살짝 엄살을 떨었는데 엄살만은 아니었다."
―이 격려가 당신에게 주는 문학적 의미는.
"이제까지 12권의 책을 냈고 나름대로 한국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문학적 시도를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한 만큼 주목을 못 받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이 상이 큰 보답이 된 것 같다. 한국의 대부분의 문학상이 상업적 고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어느 정도 대중적이지 않으면 문학상 받기 어려운 게 엄연한 사실이다. 동인문학상이 나처럼 독자는 소수이지만, 새로운 시도를 하는 작가들한테 큰 희망이 될 것 같다."
―기승전결로 대표되는 기존 서사에 대한 복수랄까. 당신의 소설에는 그런 관습에 대한 조롱이 있다.
"기승전결이 소설에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터무니없이 낡아빠진 것이다. 기승전결이 있는 소설은 소설의 넓은 범주 안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것이 마치 전체인 것처럼 말하는 소설론은 폐기되어야 한다. 소설은 곧 서사라는 이론은 아주 기만적인 것으로 소설창작론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 삶에는 소설 속의 극적인 기승전결과 같은 것이 거의 없다. 하루 하루 아무런 드라마 없이 사소하고 한편으론 무용한 순간들로 이뤄진 게 한 개인의 일생이기도 하니까. 보통 사람들의 삶과 무관한, 서사가 분명한 소설은 일반 개인의 삶을 제대로 반영해주지 않는 거다. 물론 독자들은 자신의 삶에 드라마틱한 뭔가가 없기에 소설에서 그런 삶을 보고싶어 하기도 한다. 내 소설에는 하나의 커다란 흐름을 갖는 전개는 없지만 작은 이야기들이 무수하게 있다. 그 작은 이야기들이 실제 삶과 더 맞닿아 있기도 하다. 실제 삶은 사소하고 무용하며 덧없는 사고와 행위들로 상당 부분 채워져 있다. 내 소설 속의, 전후 맥락은 결여되어 있어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인상적인 일화들은 세상을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보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의 예전 소설을 '난해하다, 어렵다'고 보는 사람이 많았다.
"난해한 소설을 쓰는 작가로 낙인찍힌 데는 문학담당 기자들의 공이 컸다. 그 덕에 독자들로부터 더 외면받게 되었다. 물론 예전 작품들이 지나치게 무거웠던 점도 있지만. 하지만 갈수록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법을 좀더 터득해가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무거움은 어떤 가벼움 없이는 견딜 수가 없다."
―이번 수상작은 유쾌하고 유머 넘치지만 너무 고급한 건 아닐까. 일회용 엔터테인먼트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겠나.
"최근 10년의 동향을 보면 순수문학을 소비하는 독자가 과거에 비해 3분의 1 수준으로 급감한 것 같다. 얄팍한 대중문화의 파급력이 문학을 무척 초라하게 만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문학의 전망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한편 요즘 젊은 세대가 갈수록 가벼운 것들에 끌리고 있지만 취향은 더 다양해지고 있는 것 같다. 그 다양함이 갖고 있는 잠재력은 확실히 있다. 그렇기에 가볍고 뻔한 문학을 찾는 독자도 있지만 그런 것들에 질린 나머지 새로운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소설을 찾는 독자도 한 쪽에선 생겨나고 있다. 새로운 방식의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도 새로운 방식의 이야기에 노출되면 좋아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한국사람들은 아직 유머에 익숙치 못하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유머를 알게 될 것이다. 내 소설은 세상과의 싸움에서의 패배의 기록이다."
―문학에서 위로를 바라는 독자도 많다. 당신의 문학은 그런 독자에게 어떤 위로를 줄 수 있을까.
"위로는 주지 않는다. 진정한 문학은 존재 자체의 절망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절망을 직시하게 되면 담담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렌즈를 준 첫 번째 작가는?
"베케트. 보통은 그의 대표작으로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떠올린다. 그의 핵심이자 본령은 소설이다. 언어를 통해 사유의 극단까지 밀어붙인 글쓰기. 특히 그의 말기 작품들은 무수한 단어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아무런 의미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 작품들을 통해 베케트가 말하려던 건 삶의 궁극적인 무의미였다."
―베케트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은.
"어릴 적 문학을 꿈꾼 적은 없었다.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어 전공으로 택했지만 흥미를 잃었고, 미술사에 관심을 갖게 돼 졸업 후 프랑스로 유학갔다. 근데 아무리 보아도 공부가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았다. 공부는 기꺼이 포기했다. 한 해 가까이 프랑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며 소설들을 읽기 시작했다. 전위적인 소설가들 작품을 많이 읽었는데 가장 매료된 작가가 베케트였다. 그의 문체를 흉내 내며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에게서 유머를 배웠다."
―당신은 신뢰받는 번역가로도 이름났다. 번역 문장과 창작 문장을 쓸 때 가지고 있는 원칙이 있다면.
"번역은 아주 어색한 느낌이 안 드는 한 직역에 가깝게 옮긴다. 한국어로 자연스러우면 좋겠지만 원문이 가진 문체를 훼손하는 건 의역이 아니라 잘못된 번역이다. 원문 자체의 어순을 살려야 그 문장의 묘미가 고스란히 살아날 경우엔 원문의 어순이 주는 본래 느낌을 살리는 데 주력한다. 창작을 할 때는 일부러 이질적인 느낌이 나는 문장을 구사하려고 노력한다."
―번역의 글쓰기가 소설가로서의 당신 문장도 영향을 미치는지.
"사람들이 내 문장을 번역투의 문장이라고 한다. 맞는 얘기다. 소설 습작을 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번역 작업을 했고 그 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미술에서 데생을 연습하듯 번역하면서 문장 작법을 익혔다. 그로 인해 번역투의 문장에 익숙해져버렸지만 굳이 벗어나야 할 필요를 못 느꼈다. 오히려 번역투의 문장이 문체의 어떤 개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익숙한 형태의 문체에서 이탈하는 문체를 구사하는 건 문학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작가에게 자신만의 문체를 발견하는 것만큼 결정적인 것은 없다."
―소설집 '검은 이야기 사슬' 등 몇몇 작품은 해외에 번역 소개됐다. 본인이 직접 영어로 번역한다고 들었는데.
"일부 단편들은 미국인 번역자와 공동 번역했다. 앞으로도 틈틈이 공역을 할 생각이다. 내 작품을 번역한 번역자들의 공통된 얘기가 번역이 아주 수월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번역투의 문장 때문이었다. '달에 홀린 광대'는 독일어로 번역되어 올해 출간되었고 독일의 권위 있는 신문에서 호평을 받았다. '목신의 어떤 오후'는 내년에 미국의 문학 전문 출판사인 달키 아카이브에서 한국소설 총서 중 하나로 출간될 예정이다. 거기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내 작품들은 한국보다는 외국에서 호평받을 거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다지 근거 없는 것은 아닐 거라고 믿고 있다."
―당신의 문학은 정치적 당파성에서 자유로워 보인다.
"정치는 내게 늘 참으로 재미없는 어떤 것이었다. 내게는 뭔가에 대한 입장이라는 게 거의 없다. 거의 모든 것에 대한 거의 모든 입장을 잃어버렸다고나 할까. 하지만 보수주의자는 생리적으로 싫어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따분하기 그지없다. 시대를 역행하는 자들과는 어울리기도 싫다. 물론 세상이 좀더 정의롭고 공평해지기를 바란다."
―대선의 계절이니 이런 질문도 하나. 박근혜·문재인·안철수 등 현실 정치인에게 작가로서 해주고 싶은 말은?
"없다. 다만 문학과 예술에 대한 상당한 이해가 있는 지도자가 이 나라에도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사람들의 마음을 좀더 세심하게 헤아리겠지. 꼭 그러란 법은 없지만. 그렇지만 꼭 그러란 법은 없다고 해서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시인 키츠가 그랬다던가. 말린 꽃 태우기를 탐닉하는 이유는.
"어느 날 약간 취해 사소한 죄를 저질러보고 싶었다. 마침 탁자 위에 바싹 마른 프리지아 한 단이 있었다. 꽃 한 송이를 집어 불꽃을 대니 작은 꽃이 삽시간에 타들어가 꽃대에서 꽃만 탁 떨어지더라. 그 모양이 오세아니아의 어느 동굴에 살 수도 있고 안 살 수도 있는 작고 까만 박쥐 같단 느낌이 들었다. 몇 개를 태우자 박쥐들이 떼를 지어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재미있어서 그후 심심하면 프리지아 꽃을 태우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여러 가지 말린 꽃을 태워보았다. 그 일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최근에 발표한 단편소설에 쓰기도 했다. 주로 술에 취해서이긴 하지만 혼자 사사로운 재를 저지르며 노는 것을 좋아한다. 사는 게 너무 지루해 그런 죄라도 저지르지 않을 수가 없다."
―작가 정영문이 아니라 인간 정영문에 대한 관심으로 질문을 좀 바꿔 보자. 대한민국 최장신 작가일 것 같다.
"185㎝다. 아무리 보아도 쓸 데 없이 길기만 하다. 어릴 때부터 키가 크다고 놀림도 많이 받았다. 대학에 들어간 1980년대 초만 해도 버스 천장이 낮아서 버스에 타면 천장을 이고 서 있어야 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재미있어 했는데 그럴 때면 이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재미를 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서 있곤 했다."
―고향 함양에서 정영문은 어떤 소년이었나.
"어린 시절 내내 아주 먼 곳에 가고 싶었다. 항해하다 표류해 무인도에 정착하는 것 같은 꿈을 꾸곤 했다. 8남매 중 막내인데, 아버지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나를 쉰다섯에 낳았다. 아마 자신도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실수로 태어났다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았다. 남매들이 배가 달라 큰누나는 친엄마보다 나이가 많았다. 이상한 가족 구성이었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섯 살 터울인 바로 위 형과 강으로 산으로 놀러다니기를 즐겼다. 지금 생각하면 오지의 원주민 아이처럼 수렵생활 비슷한 것도 하곤 했다. 자연 속에서 자란 것이 소설을 쓰는 데 큰 자양분이 되었다. 한번은 집 앞마당 감나무에 홍시 따러 올라갔다가 가지가 부러져 떨어졌다. 죽을 뻔 했고, 죽는 줄 알았다. 그때부터 내가 좀 이상한 아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늘 뭔가를 골똘히 보며 온갖 생각에 잠기기를 좋아했다. 지금의 나는 당시의 그 아이에서 크게 멀어지지 않았다. 대학에 합격한 1983년 초에는 김천에서 통일호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왔는데, 열차가 정차하기도 전에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가 승강장에 떨어져 기절했다. 눈을 떠 보니 사람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더라. 사람들이 나를 내려다보며 구경하고 있는 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서 그대로 있었다. 길다란 애가 승강장에 뻗어 있으니 놀랍고도 우스웠겠지. 놀라워하며 우스워할 시간을 좀더 주고 싶었다. 그러다 누가 병원에 데려다 준다길래 부축도 거절하고 혼자 일어나서 걸어가다가 다시 쓰러졌다. 그리고 병원 응급실에서 눈을 떴다. 그것이 나의 공식적인 서울 입성이었는데 조짐이 좋게 느껴졌었다. 학창시절에는 거의 아무런 꿈이 없었는데 그것이 무척 달가웠다."
―수상을 다시 한 번 축하한다. 경제적으로도 '천만다행'이라니, 더 다행이고. 상금은 어디에 쓸 계획인지.
"일단 그사이 진 빚을 좀 갚고, 일부는 월세 보증금에 보탤 것이다. 좋아하는 선후배 작가들에게 밥과 술도 사주고. 그동안 너무 숨가쁘게 글을 써온 것 같다. 한숨 돌리고 싶다. 어디 가 좀 쉬며 건강을 회복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