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한진해운 회장은 11일 서울 여의도 한진해운 본사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내 자식부터 과시적인 결혼식 대신, 작고 의미 있는 결혼식을 실천하겠다”면서 대기업 오너 중 처음으로 ‘1000명의 작은 결혼식 릴레이 약속’에 동참했다.

1985년 10월 8일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경찰관이 경광봉을 들고나와 서울 강북 도심에 차가 못 들어오게 했다. 148개국 대표 3200여명이 서울에 모여 '세계은행·국제통화기금 총회'를 여는 날이었다. 이날 오후 4시쯤 23세 신부가 교통 통제에 발이 묶여 쩔쩔맸다. 결혼식장은 서울 소공동 한진그룹 본사 강당. 신부가 차창을 내리고 경찰관에게 웨딩드레스를 보여줬다. "이 차림이라 뛰어갈 수도 없고…. 결혼하러 가는 신부니까 한 번만 봐주세요!"

그렇게 해서 무사히 식장에 도착한 '화요일의 신부'가 최은영(50) 한진해운 회장이다. 11일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난 최 회장은 "그때만 해도 옛날이라 선 보고 딱 세 번 만난 뒤 결혼했다"면서 "요즘은 어느 결혼식장에 가건 제가 결혼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화려하고, 혼수와 예단도 지나치게 많다"고 했다.

"제가 당사자일 땐 뭐가 어떻게 준비되는지 잘 몰랐어요. 저보다 먼저 자식 결혼시킨 분들에게 들어봤더니 '뭐도 해가야 한다', '뭐도 필수다'…. 그런 얘기를 한참 듣다가 '저는 그런 거 안 하고 싶다'고 했더니 '최 회장이 아직 어려서 세상을 모르는데, 안 해가면 혼난다'고 하시더군요."

최 회장은 "준비하면서 기쁘고, 다 끝나면 오래 기억나야 하는 게 결혼식인데, 우리나라 결혼식은 준비하면서 피곤하고, 다 하고 나면 병나서 드러눕더라"고 했다.

"지난번 누구네 결혼식 때 나온 꽃과 비슷한데 색깔만 바꿨구나. 저 가수가 또 나온 걸 보니 이 호텔 '패키지'인가 보다. 지난번엔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부르더니 '10월'만 '11월'로 바꿔서 부르는구나…. 식장에 앉아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최 회장은 여덟 살 위 조수호(1954 ~2006) 전 한진해운 회장과 2녀를 뒀다. 두 딸이 어렸을 때 세 모녀가 동네 은행에 걸어가서 결식아동 돕는 계좌에 후원금을 넣곤 했다. 최 회장은 남편이 3년간 암으로 투병하다 별세한 뒤 경영 일선에 나섰다. 최 회장은 "가족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고문"이라고 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된다는 걸 본인도 알고 우리도 아는데 누구도 그런 사실을 말하지 못했어요. 서로에게 힘을 주느라 아닌 척했지요. 저는 남들 결혼식 가서 신랑·신부가 양가 부모님에게 인사하는 순서가 되면 찡해요. 몇년 뒤면 저도 그 자리에서 딸들을 보낼 테니까요. 어릴 땐 그런 마음 몰랐어요. 남편이 안 계셔서 그날 혼자 있을 거라 생각하니 더 그런 것 같아요."

최 회장은 "제가 어려운 시기를 견뎌낸 힘은 (물질적인 부가 아니라) 남편에 대한 신뢰와 '엄마로서 아이들 앞에 흐트러지지 않겠다'는 각오였다"면서 "이제 막 출발하는 자녀에게 모든 것을 갖춰주려 하는 부모가 많은데, 결혼에서 정말 중요한 게 뭔지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기업인들도 옛날 어른들은 훨씬 검소하셨어요. 요즘은 딸 가진 부모가 밥솥부터 숟가락까지 다 챙겨 보내고, 아들 가진 부모가 그릇까지 무슨 브랜드 사오라고 다 지정해준다는데, 그릇값 듣고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무슨 메디치 가문에서 프랑스 왕실로 시집가는 것도 아니고…. 60만원짜리 냄비, 살림 안 해본 초보는 줘도 못 써요. 자기네가 살 집에 뭐가 필요한지 스스로 궁리하고 마련해야지 부모가 인형의 집처럼 갖춰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최 회장은 "매일 조선일보 기사 읽고 '정말 좋은 일 한다'고 생각했다"면서 "누군가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두 딸과 '우리 가족은 작지만 의미있는 결혼식을 하자'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두 딸도 어머니 의견에 공감해 "가족의 역사가 깃든 화물선 컨테이너 위에서 결혼식 올리는 건 어떠냐"고 말하기도 했다.

"저는 두 딸이 '꽃값이 얼마 들었다'는 얘기가 오가는 그런 결혼식을 하는 걸 바라지 않아요. 어릴 때부터 자신을 지켜본 분들 앞에서 자기 스스로 모든 걸 결정해서 작지만 아름다운 결혼식을 올리길 바랍니다."

"결혼은 혼자 하는 게 아닌데 사돈이 싫어하면 어떻게 하느냐?" "재계에서 왕따 당하면 어떡하느냐?"고 묻자 그는 "그런 집안하고는 사돈 안 맺으면 된다"고 했다.

[[천자토론] '작은 결혼식' 올리는 사회가 되기 위해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