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

바쁜 일상생활을 사는 우리는 대부분 바로 이틀 전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조차 기억하기 어렵다. 그런가 하면 수십 년 동안 불러보지 않았던 어릴 적 만화영화 주제가는 너무나 정확히 기억나서 우리를 당황하게 하기도 한다. 도대체 기억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우리가 알츠하이머 치매를 두려워하는 건 기억을 잃는 순간, 지금 건강한 나 자신이 더는 아닐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치매에 걸리면 우리는 기억을 잃고, 어쩌면 '나'라는 존재를 단 한 번 잃을 뿐이다. 그런데 나라는 존재를 날마다 새로 잃은 사람이 있었다. 헨리 몰래슨(Henry Gustav Molaison·1926~2008·H.M.이라고 불림)이라는 사람은 간질을 앓기는 했지만, 그저 한 평범한 미국 젊은이였다. 27세 되던 해, 그는 의사의 조언을 따라 간질을 일으키는 뇌 부위로 생각되는 부분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기로 결심했다. 수술 뇌 부위는 내측두엽이었고 해마라는 부위도 포함하고 있었다.

당시 H.M.도, 의사도 알지 못했던 사실은 해마 없이는 새로운 기억이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해마는 경험이 머리에서 '장기기억'으로 변하는 위치라고 볼 수 있다. 해마가 사라진 이후, 그는 수술 전에 있었던 일들은 완벽하고 명확하게 기억했지만 수술 이후의 삶에서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는 없었다. H.M.은 수술 후부터 사망할 때까지 50여년의 삶 동안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자신에게 그 전날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지 못했고, 자신이 왜 병원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의사의 설명을 듣곤 슬퍼했지만, 금방 다시 잊어버리며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되묻곤 하는 날들이 날마다 계속됐다.

H.M.에게 '나'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에게 과거란 무엇이고, 미래란 무엇이었을까?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5분마다 자신의 삶을 타인을 통해 매번 새로 인식해야 했던 H.M.에겐 아마도 '나'라는 단어 자체가 무의미했을 수도 있다.

독일 막스플랑크 뇌연구소에서 대학원생으로서 난생처음 인간의 뇌를 실제로 본 날 정말 흥분했던 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런데 이런 기분과 함께 받은 충격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뇌가 그다지 놀랍게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뇌는 그저 다소 역겨운 섬유질과 액체로 가득 찬 핏기 어린 무게 1.5㎏의 묵직한 고깃덩어리였다. 뇌를 해부하고, 도려내고, 파헤쳐 보았지만 그 안에는 기억도, 영상도, 소리도 없었다. 그 이후 뇌를 이해하려고 일해 온 나 역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아름다운 멜로디, 방금 보고도 또 보고 싶은 연인의 얼굴,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나, 이 모든 것이 결국 그 고깃덩어리를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가끔은 믿기 어렵고 두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