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부산 출신 25세 동갑내기 신혼부부가 아들을 낳았다. 아기 아빠는 아직 학생이었다. 당장 분유값 댈 일이 막막했지만, 양가 모두 마냥 부모에게 기댈 형편이 못 됐다. 아기 아빠는 영남대를 중퇴하고 일거리를 찾아나섰다.
처음 2~3년은 목공예로 먹고살았다. 그 뒤 장사를 해보기로 마음먹고 서울에 올라갔다. 유명한 족발집에 들어가 일을 배운 뒤 상계동에 자기 가게를 냈다. 부부가 온종일 고기를 삶고 썰었다. 칼질하다 피가 철철 나게 손을 베기도 했다. 그렇게 모은 돈을 밑천으로 1992년 경남 창원에 내려가 '교차로신문'을 냈다. 맨손으로 출발해 연 매출 300억원짜리 알짜 기업을 일군 정길웅(50) MK그룹 회장 얘기다.
정 회장은 12일 "그동안 직원들에게 몇 번이나 '결혼식에 쓸데없이 돈 쓰지 말고 우리 회사 강당(100석)에서 하라'고 했는데 아무도 따르는 사람이 없어 내가 직접 '시범'을 보이기로 마음먹었다"면서 본지와 여성가족부가 펼치는 '1000명의 작은 결혼식 릴레이 약속'에 동참했다.
그는 사돈을 설득해 오는 12월 장남(25)을 장가보낼 때 회사 강당에서 '작은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양가 친척과 신랑·신부 친구만 초대하고, 피로연 음식도 회사 구내식당에서 준비하기로 했다. 예식 시간을 오후 3~4시로 잡아, 식사 대신 국수와 떡만 간단히 차릴 계획이다. 예산은 500만원이다.
정 회장은 또 아들 신혼집으로 회사 근처에 있는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0만원짜리 원룸을 얻어주기로 했다. 아들은 MK그룹 계열사에서 연봉 3000만원을 받고 있다. 정 회장은 최근 아들과 예비 며느리(26·음악강사)를 불러 "너희가 어린 나이에 결혼하느라 저축이 부족할 테니 신혼집 보증금은 내주겠지만, 그냥 주는 게 아니라 빌려주는 거니까 월급 모아서 갚으라"고 했다.
정 회장은 본지와 인터뷰에서 "지금은 사업이 안정됐지만 초기엔 말도 못하게 고생했다"고 말했다. 족발집 할 때 지하 단칸방에서 온 식구가 연탄가스 마시고 죽을 뻔한 적이 있다. MK그룹 창업 초기, 직원들 봉급 줄 돈이 모자라 부산으로 사채를 구하러 갔다. "돈을 못 구한 채 집으로 돌아오는데, 차(車)가 영도다리를 지나가니까 '고마 확 뛰내릴까'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처자식 얼굴이 아른거려 못 뛰어내리고 도로 차에 탔지요."
창업 초기 그는 한 주에 4만부를 찍었다. 지금은 주6일 하루 3만 부를 찍는다. 직원이 10여명에서 300여명으로 수십 배 늘고, 계열사도 여럿 생겼다.
그는 "힘든 시기를 넘기고 나니, 처음엔 돈 버는 게 신이 나서 저도 막 까불었다"고 했다. 남들처럼 골프도 치고, 이런저런 단체에 이름도 걸었다. 창원 시내에 있는 대형 홀에서 화려하게 창업 1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늦둥이 차남(13)을 낳았을 땐 수백 명을 초청해 돌잔치를 치렀다.
하지만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을수록 허례허식에 염증이 났다. 최근 창업 20주년 기념식 때 정 회장은 외부 인사를 일절 초청하지 않고 회사 구내식당에서 특식을 마련해 직원들을 배불리 먹였다. 요즘 그는 골프 대신 등산을 한다.
"10년 전이었다면 저도 호화 결혼식을 치렀을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나이 들수록 번잡한 게 싫어졌어요. 화려하게 꾸민 남들 결혼식장에 가도 '성대하다'는 생각은커녕, '신랑·신부 봉급이 얼만데 이렇게 헛돈을 쓰나' 싶더라고요."
올 초 아들이 신붓감을 데려왔다. 작은 결혼식을 올리자는 정 회장의 말에, 사돈 내외는 물론 부인도 질색했다. 정 회장이 몇달 동안 끈기있게 설득해 '오케이'를 받았다. 불과 한 달쯤 전의 일이다. 그는 "다들 반대하니까 '혹시 내가 바보인가?' 싶었는데, 조선일보 기사가 큰 응원이 됐다"고 했다.
"아들에게 '물려받을 생각 말고, 네가 스스로 클 생각을 하라'고 했어요. 공부도 시켜주고 사업도 가르쳐주겠지만, 집 사주고 호화 결혼식 시켜주는 건 아이를 오히려 망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화려하게 출발하면 돈 무서운 줄 모르거든요."
그는 딸(24·미국 유학 중)과 막내아들(13)도 작은 결혼식을 시킬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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