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신동흔의 휴먼 카페] '공장형 커피숍' 테라로사 김용덕 대표

조선일보
  • 신동흔
    입력 2012.10.13 03:08 | 수정 2012.10.14 14:53

    고졸 은행원 '커피 왕국' 일구다

    원두 직접 수입… 호텔·백화점 납품도
    IMF때 명퇴… 레스토랑 운영하며 인연
    좋은 원두 찾아 남미 등 돌며 커피 독학
    국제커피대회 'COE' 심사위원 초대받아

    서빙 점원도 1년에 두번 해외연수
    '우리 가게 막내 실력이 우리 회사의 실력'
    입버릇처럼 말하며 직원들 혹독하게 교육
    "산지 가보고 유명커피숍 가봐야 안목 생겨"

    강릉 찾는 외지인들 필수 방문지로
    "커피의 맛은 로스팅 능력에 좌우돼
    신맛이 강하게 나는게 맛있는 커피"


    카페는 큰길에서 지방도로 접어들었다가 다시 논밭 사이로 난 농로를 따라 200m 정도를 들어가서야 나왔다. 붉은색 벽돌 담장을 지나 구부러진 길을 따라 안으로 접어드니 예상치 못했던 풍경이 펼쳐졌다. 남유럽풍의 정원과 유리온실, 실내 카페, 로스팅 공장을 한데 모아 놓은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화분에 심어 놓은 30여 그루 커피나무에는 커피 열매가 알알이 맺혀 있었고, 창고에는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수입된 생두(그린 빈)가 자루째 그득 쌓여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커다란 로스터가 돌아가며 커피를 볶았고, 직원 5명이 달라붙어 쉴 새 없이 전국 각지의 카페와 호텔, 개인 가정에 보낼 원두를 포장하고 있었다. 손님들은 그 옆에서 커피를 마시고 담소를 나눴다. 김용덕(53) 대표는 "그야말로 '커피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며 "우리 집 커피에 맛을 들이면 다른 집 커피는 마시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사장은 21년 동안 은행원 생활을 하다가 지난 2002년 이곳에 '공장형 커피숍'을 열었다. 독특한 인테리어와 커피 맛으로 조금씩 이름을 알렸던 이곳은 강릉을 찾는 외지인들이 빼놓지 않고 거쳐가는 유명 관광코스 중 하나가 됐다. 10년 만인 올해 강릉을 벗어나 부산 해운대 마린시티와 용인 죽전의 신세계백화점에 매장을 열었다. 테라로사는 생두의 상태나 가공 과정, 단맛·풍미 모두 최고 수준인 '스페셜티 커피'를 다룬다. 메뉴판에는 커피 원두의 종류와 재배지·해발고도·가공방법 등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모두 김 사장이 직접 남미와 아프리카의 산지를 돌아다니며 농장주를 만나 수입한 원두로 만든 커피다. 그가 종업원에게 내올 것을 주문해 함께 마신 엘살바도르산 커피에선 신맛이 강하게 났다. 그는 "그게 맛있는 커피"라고 말했다.

    최고의 커피를 찾아서

    ―신맛이 나는 커피에 대해서는 낯설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커피 맛에 객관적 기준이 있을까.

    "분명히 있다. 예를 들자면 쌀밥이나 김치 맛에 관한 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까다로운 입맛을 갖고 있지 않나. 우리는 도저히 맛이 없어서 못 먹는 김치도 외국 사람들은 맛있다고 먹는다. 커피 문화는 확산되고 있지만 아직 커피 맛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정돈되지 않아 오는 오류가 많다."

    ―지금 전국에 커피숍이 1만5000개일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커피를 많이 마신다. 당신이 추구하는 '맛있는 커피'는 무엇인가.

    "깨끗해야 한다. 이는 가공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좋은 커피는 깨끗한 물에 씻어 그물망(아프리칸 베드) 위에 말린다. 산지에서 아스팔트 바닥 위에 말리면 그 위에서 애들 공차고 차 지나가고… 그런 맛이 다 올라온다. 따는 순간부터 모든 과정이 깨끗해야 한다. 맛은 단맛과 신맛이 있다. 과일이기 때문이다. 혀가 훈련이 어느 정도 되어야 한다. 우리가 과일마다 단맛과 신맛의 차이를 느끼듯이 커피도 차이가 크다. 또 토질에 따라 향이 다양하게 난다."

    ―결국 원료의 차이가 모든 것을 좌우하나.

    (커피가 자라기 좋은)‘ 붉은 땅’이라는 의미의 테라로사 커피숍에는 마당 한쪽에 커피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또 다른 한쪽에선 커피를 볶는 로스팅 하우스가 있었다. 커피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김용덕 사장은“소비자들이 커피의 맛을 알아갈 수록 우리나라의 커피 시장은 몇 배로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 이범석 객원기자 sejamai@chosun.com
    "좋은 커피는 밀도가 굉장히 높다. 알갱이가 작을 확률이 높다. 그러면 로스팅이 힘들다. 좋은 콩을 쓰는데 로스팅 기법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고, 혀가 훈련이 되지 않아서 잘 볶았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 커피가 가진 맛을 최대한 뽑아내는 로스팅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원두 생산지를 돌아다니고 해외의 유명하다는 커피집들을 정기적으로 다닌다."

    ―복잡하다. 굳이 직접 돌아다니지 않고 좋다고 하는 것을 사다가 쓰면 안 되나.

    "처음에는 나도 일본에서 원료를 받아서 썼다. 그러다 2008년에 COE(Cup of Excellence)라고 하는 국제 커피 선발대회에 옵서버로 참가했다가 내가 맛을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곳에서 알게 된 미국의 인텔레젠시아나 스텀프타운 같은 유명 커피회사 겸 커피하우스를 직접 찾아가 맛을 보고 절망감에 빠졌다."

    ―어떤 절망감이었나.

    "왜 나는 이런 커피 맛을 내지 못하나 하는 자괴감이었다. 충격적이었다. 그동안 유럽의 유명한 커피숍들 다니고 일본의 로스팅 하우스를 다니며 나름대로 커피 공부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시행착오를 크게 한 셈이었다."

    ―꼭 그렇게 다녀야 최고급 원두를 구해올 수 있나.

    "전 세계를 오지랖 넓게 다녀야 한다. 우리는 커피 회사다. 지금도 1년 중 6개월은 해외에 나가 있다. 우리 회사의 강점이 해외 네트워크가 튼튼하고, 맛을 분별할 수 있는 실력이 탁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커피 관련 자격증을 갖고 있나.

    "자격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COE에 간다. 거기서 실력 없는 사람은 10분만 대화하면 여지없이 드러난다. 우리 회사 이윤선 부사장과 나는 거기에 심사위원으로 초청받고 있다. 국제무대는 자격증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농장주들을 만나면 그들이 우리에게 커피 맛을 보게 한다. 그들도 우리 실력을 간파하려는 것이다. 커피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어떻게 실력을 갖추게 됐나. 많이 먹어보면 아나.

    "많이 마셔보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 쌀 같은 경우 매일 밥을 먹으니까 밥맛이 좋다 나쁘다 알 수 있지 않나. 하지만 이 쌀이 어떤 품종이고 어떻게 만들고 분석적으로 설명하는 능력은 전문가의 영역이다."

    ―어느 시점부터 그것이 가능해졌나.

    "이 사업 시작하고 8~9년 정도 됐을 때 일이다."

    ―학습 코스가 있나.

    "나는 독학하며 경험을 쌓은 부류다. 지금 국내에도 미국의 한 커피협회에서 주는 자격증이 있는데 300만원 내고 일주일 강의 듣는 코스다. 한국인 중에서 그 자격증 소지자가 현재 2년 만에 400명이 됐다. 이는 전 세계 자격증 소지자(800여명)의 절반이 한국에 있는 셈이다. 좀 과도하다."

    ―한국 커피 문화에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

    "커피의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향고양이 배설물에서 나온 원두로 만든 루왁 커피가 호텔에서 한 잔 3만5000원에 팔리고 모 대기업 회장도 그 커피만 드신다는데, 과연 그 커피를 깨끗한 커피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은 브라질 농장에서 커피 원두 가격 더 받으려고 사향고양이를 집단 사육하는 지경이다."

    ―당신이 추구하는 커피는 대중적 취향과 거리가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 우리 가게 매출의 90%는 커피숍 매장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전국의 호텔과 카페, 개인 가정으로 보내는 커피 판매에서 나온다. 이미 많은 사람이 커피의 맛을 알아가고 있다. 우리가 개인 가정에 판매하는 원두 매출만 월에 1억원대를 넘겼다. 스타벅스류의 커피가 아니라 앞으로는 이 시장이 더 커져 갈 것이다."

    은행원에서 커피 회사 사장으로

    그의 인생 전반기는 커피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지금은 동해로 이름이 바뀐 묵호에서 자랐다. 2남4녀 중 넷째였던 그는 10세 무렵부터 항구에 나가 오징어 배를 땄고, '아이스케키' 통을 짊어지고 버스 정류장을 돌아다녔다. 그는 "이틀 동안 밥을 먹지 못했던 적도 있다"며 "오징어 10마리 배를 따면 1원을 벌던 시절인데 그 돈 모아서 초등학교 육성회비에 보탰다"고 했다. 공부를 잘했던 그는 상고에 진학했고,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세에 조흥은행에 취직해 가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런 그가 IMF 외환위기가 닥친 1997년 명예퇴직을 하고 유럽으로 떠난다. 나이 마흔 무렵이었다. 그리고 돌아와 1999년 속초에 레스토랑을 열었고, 3년 뒤 그것도 집어치우고 강릉에 테라로사를 열었다.

    ―은행에서는 잘린 것인가.

    "아니다. 우연히 명예퇴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고, 과장 말년 차에 집사람한테 상의도 없이 충동적으로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미술학원에 등록했다. 야간대학을 나왔지만 막연하게 주간 대학을 다녀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서 건축학과에 편입도 했다가 6개월 만에 그만뒀다. 그후 한 달 단위로 국내를 들락날락하며 세계 여행도 했다. 그리고 1년쯤 지나 속초에 레스토랑을 열었다. 커피는 그때 접했다."

    ―레스토랑이 잘 안 됐나.

    "잘됐다. 후식 커피를 맛있게 만들어 보려고 로스팅 기계를 직접 사서 볶다가 일본의 유명 커피하우스를 다니면서 커피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너무 무책임한 가장 아니었나.

    "아이들에게 신뢰를 잃은 적은 없다. 사업을 시작하고 뻔질나게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2005~2006년 25억원까지 부채가 늘었지만 가족들에게 어려움을 준 적은 없다."

    ―사업적으로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나.

    "커피 사업 시작하고 3년 만에 돈을 다 까먹었다. 다행히 은행권에 인맥이 있어서 대출을 받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를 앞두고 대출 회수 압박이 들어오면서 돌려막기를 하다가 사채까지 썼다. 그런데도 묘하게 '나는 절대 가족들 밥 굶기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커피라는 분야에 몰두한 것이나 지나칠 정도로 느긋한 낙관주의, 이런 것들 모두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이었다."

    ―그런 것은 어린 시절 가난의 경험과 관계가 있을까.

    "어릴 적 내가 살던 옛날 묵호의 산동네에 아이들(1남1녀)을 데리고 간 적이 있다. 지금도 바다에서 산비탈로 깎아지른 듯 올라가 있는 산동네다. 내가 이런 어려운 환경을 딛고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이런 삶도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홀 서빙 종업원도 1년에 두 번 해외 연수 보내

    ―현재 테라로사는 커피 가게를 늘려가고 있다. 어느 정도까지 가게를 늘릴 계획인가.

    "서울에 한 10개까지는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프랑스 파리에 우리 커피숍을 여는 꿈도 갖고 있다. 거기서 한국에서 교육받은 직원들이 일할 것이다."

    ―그렇게 커피의 맛을 강조하는데, 가게가 늘수록 맛을 균일하게 유지하기 힘들지 않을까.

    "나는 늘 '우리 집 막내의 실력이 우리 회사의 실력'이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한다. 우리는 직원들을 혹독하게 가르친다. 처음 입사하면 주문받는 법을 가르치고 2개월 차가 되면 메뉴를 가르친다. 나중에는 스스로 맛을 보고 연습하면서 표현하는 법을 익힌다. 바(bar)에 서기 전에 테스트를 통과 못 하면 그만둬야 한다."

    ―현재 직원이 몇 명인가.

    "부산과 용인 매장에 나가 있는 직원들까지 50명이다. 전 직원이 1년에 두 번은 해외를 나간다. LA의 인텔레젠시아 매장도 가고 남미의 커피 산지도 간다. 그렇게 직접 몸으로 배우고 안목을 키워야 최고의 커피가 나온다. 내가 그 눈을 뜨지 못해 7~8년을 허송세월한 것이 아깝기 때문이다."

    ―서빙하는 직원들도 보내주나.

    "바로 그 직원들을 보내야 한다."

    ―그렇게 키워 놓았는데 나가버리면 어떡하나.

    "그게 무서우면 사람 키우지 못한다. 그래 봐야 결국 우리나라 커피 실력으로 남는 것 아닌가."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