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여론조사 결과라면 코 골던 사람도 귀를 쫑긋하는 요즘이다. 달력 두 장 넘기면 대선 날이니 그럴 만하다. 그러나 엎치락뒤치락하는 숫자 놀이에 끌려다니다 보면 대세(大勢)를 놓치기 쉽다. 파도가 몇 번 일었다고 바다 밑 지형(地形)까지 바뀌진 않는다. 어림잡아 오늘의 대선 판세는 여야 50대 50, 야당에 후(厚)하게 쳐줘서 49대 51 정도다. 우리 유권자 숫자는 40대 후반을 경계로 위 세대와 아래 세대로 거의 반분(半分)된다. 젊은 쪽이 약간 많지만 그 차이는 위 세대의 높은 투표율로 메워진다. 위로 올라갈수록 보수색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진보 컬러가 짙어진다. 보수·진보가 백중지세(伯仲之勢)라는 말이다.
여야의 고정 지지층 크기도 엇비슷하다. 여론조사에서 일편단심(一片丹心) 박근혜를 꼽는 고정 지지자가 37%다. 반면에 문재인과 안철수를 오가면서 한사코 박근혜는 마다하는 유권자가 38%다. 나머지 25%는 정치 무관심층이거나 조사마다 지지 후보를 바꾸는 정치 유목민(遊牧民)이다. 3자 가상(假想) 대결에서 박근혜는 문재인·안철수를 10~15%포인트가량 리드하지만, 두 후보 지지율을 더한 것보다는 늘 10%포인트 이상 뒤진다. 지지 후보를 바꿔가는 유동층이 야권 특히 안철수 지지에 얹혀있는 결과다. 이들이 언제까지 안철수 주위에 머무를지 예측하긴 어렵다. 야권 후보 단일화가 이뤄질지, 된다면 문·안 가운데 누구를 내세울지 하는 단일화 방향이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결국 여야 어느 쪽도 두 달 앞을 장담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여야 고정 지지층 사이의 경계는 이미 그어졌고 두 진영 모두 더 이상 영토를 확대하긴 어렵다. 여야 본선(本選) 공방의 초점도 유동층을 어떻게 끌어오느냐로 좁혀질 수밖에 없다. 야권은 한 고개를 더 넘어야 한다. 단일화란 중간역(中間驛)을 거쳐야 한다. 물론 문재인·안철수 다 본선으로 직행할 수도 있다. 그러면 야권 필패(必敗)라는 게 정설이다. 양쪽 모두 이 사실도 알고, 단일화를 정면 부인하는 순간 명분(名分)도 같이 허물어진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단일화 문제는 어물쩍 넘어간다.
그러나 단일화 성사(成事) 조건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2002년 노무현·정몽준 사이의 단일화는 두 후보 지지도가 20% 안팎에서 고착(固着)됐을 때 이뤄졌다. 어느 한쪽이 분명한 오름세를 타면 그 후보는 협상 테이블이나 여론조사에 운명을 맡기는 게 내키지 않는다. 2002년 단일화에서 노무현의 손을 들어준 건 호남의 노무현 지지도였다. 슬금슬금 올라가더니 불과 며칠 사이 정몽준의 두 배 가까이로 치솟았다. 이번도 여론조사 방식의 단일화를 택한다면 야당 귀속감(歸屬感)이 강한 호남 동향이 중요 변수가 될 것이다.
본선이 개막되면 대선의 주전선(主戰線)은 영산강 유역에서 낙동강 주변으로 이동한다. 부산·경남의 지지율이 10%포인트 오르내리는 건 40만표 이상이 왔다 갔다 한다는 뜻이다. 표를 빼앗긴 측이 다른 곳에서 이 손실을 벌충하지 못하면 결과적으론 100만표 가까이를 잃게 되는 셈이다.
2002년 노무현·이회창 후보는 이곳 표를 30대 65로 갈랐다. 부산·경남의 문재인·안철수 지지율은 지금 40대 50으로 박근혜에게 육박하고 있다. 박근혜 진영에 비상벨이 울린 것이다. 그렇다고 야권이 편한 신세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본선 승패가 낙동강 전과(戰果)에 달려있는 게 빤히 보이는데도 단일화 주도권을 쥐려면 영산강 언저리를 헤매야 하는 게 그들 처지다.
트루먼은 2차대전 시 원폭(原爆) 일본 투하, 6·25전쟁 때 미군 파병,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 해임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가장 자주 내린 미국 대통령이다. 그 트루먼이 '모세 시대에 여론조사가 있었더라면, 모세도 유대민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킬 것인지 끝내 결정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세 후보 진영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복지·경제·재벌개혁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한국 대선판의 최고 사령탑이자 최고 정책 입안가로 후보와 참모들의 머릿속에 들어앉아, 정책 방향과 내용을 지시하는 건 여론조사다. 여론조사가 한 표가 아쉽다고 귀띔하는 터에 '무엇이 가능하냐' '어떻게 하는 게 옳으냐' '누구와 할 것이냐'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여론조사를 이렇게 받들어 모시다간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휴전선에 이상(異狀)이 생기면 여론조사에 먼저 묻고 대응 방향을 결정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지난 10년 정권 탄생과 몰락의 역사는 여론조사를 가정교사로 모시고 허겁지겁 승리를 거머쥐면 붐빠붐빠 주악(奏樂)을 울리며 장관·수석·위원장 자리를 떡 나누듯 돌린 첫 조각(組閣)과 함께 우지끈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고 요약할 수 있을지 모른다. 세계가 심상치 않고, 동북아는 더 수상스럽게 흘러가는 요즘이라 변변한 집권 행동 계획(action plan) 하나 없이 배짱 좋게 달려가는 대선 풍경이 더 마음에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