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고맙소. 모두들 잊어 가고 있었는데…. 난 한시도 잊은 적이 없소. 이제 추모비 건립에 나도 적극 나서겠소"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아웅산 묘소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 사건에서 공식 수행원 중 유일하게 생존했던 이기백 당시 합참의장(81·전 국방부 장관)은 11일 오전 10시쯤 본사 편집국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29년 만에 공개된 당시 사진<본지 11일자 A1·3면 참조>을 보고 나서다.
이날 오후 충남 계룡대에서 열린 육군참모총장 취임식 참석차 내려가는 이 전 장관을 서울역에서 만나 대전역까지 동행하며 인터뷰했다. 이 전 장관은 "(사진에 나온) 처참한 장면은 나도 처음 봤다"면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폭탄 테러가 나고 정신을 잃었으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직접 그 상황을 겪은 나도 사진으로 보니까 충격이었는데, 일반 국민은 더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동안 유족들이 먼저 연락하기도 힘드셨을 테고, 나도 먼저 연락하기 어려워 따로 만난 적은 없다"면서 "하지만 지금도 나만 살아남은 게 죄스럽고, 그래서 순국한 분들에 대한 쓰라린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이후 매년 10월 9일이면 아웅산 테러 희생자들의 순국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이 전 장관은 또 "학교에서 이 내용을 자세히 배우는 것도 아니고, 누구 하나 나서서 이슈화하지도 않았으니까 국민 대부분이 (아웅산 테러를) 망각했다는 게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면서 "그래서 당시에 공개됐던 것보다 뒤늦게 사진이 공개된 게 잊고 지내던 많은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오히려 잘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사진을 찍어 조선일보를 통해 공개한 그분은 정말 용기 있는 분"이라며 "추모비 건립을 위한 모금 운동이 크게 일어나 이런 잔인한 짓을 했던 집단이 있다는 것을 모든 국민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9년 만에 공개된 아웅산 테러 사진을 보고 당시 상황을 떠올린 이는 이 전 장관뿐이 아니다. 당시 폭탄 테러로 중상을 입은 이 전 장관을 구출한 전인범 한미연합사 작전참모차장(소장)은 "눈앞에 놓인 신문의 사진 속으로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이 전 장관의 부관(副官)이었던 전 소장은 "뚜껑이 열린 것처럼 머리에 상처를 입고, 두 발에 골프공만 한 구멍이 뚫린" 이 전 장관을 양철로 된 지붕 조각에 눕혀 병원으로 옮겼다. 전 소장은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히고 진짜 그런 일이 있었는지 꿈만 같다"고 말했다.
당시 대통령 경호원이었던 장기붕(58)씨는 이번에 사진을 본지에 기탁한 김상영씨를 현장에서 구한 사람이기도 하다. 장씨는 "폭탄이 터졌을 때 방탄복을 입고 있었는데 양복 등판이 찢어졌고, 방탄복에 0.5㎜ 크기의 쇠구슬 파편이 30개 이상 박혀 있었다"며 "대부분은 죽었다고 판단할 정도로 처참했다"고 회상했다. 또 "사진을 공개한 김상영씨도 피투성이 상태에서 내가 업고 나왔다"며 "김씨는 거의 의식이 없었는데도 카메라는 꽉 붙들고 놓지를 않더라"고 말했다. 역시 당시 대통령 경호원이었던 김민수(57) 국민연금공단 업무이사는 "(신문에 실린 사진은) 내가 직접 본 것과 완전하게 일치한다"고 말했다. 김 이사는 "폭탄이 터진 현장에서 대통령을 모시러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도중에 폭발이 일어났다"며 "그 모습은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부상자들을 국내로 후송한 특별기의 기내 사무장이었던 오흥국(67)씨도 "아침에 신문에서 당시 사진을 보자마자 그때 생각이 났다"며 "부상자들을 후송해 오던 당시 상황은 전쟁터 야전병원을 방불케 했다"고 말했다. 현지에 도착한 오씨 등 승무원과 의료진은 나무 작대기 두 개에 천을 덧대 '들것'을 만들어 부상자들을 기내로 옮겼다. 오씨는 "얼굴에 파편이 잔뜩 박혔던 한 신문기자는 '만년필을 빌려달라'고 하더니 기사를 썼고, 위급한 환자가 많아 의료진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수술을 해야 했다"고 전했다. 오씨는 특히 "부상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될까 봐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아서 기내에는 신음만 들렸던 게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