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문화가 농담인가

조선일보
입력 2012.10.08 23:30

여야 대선 후보들 '문인 멘토' 모시고 회견장에 앉히며 직접 찾아가기도
과거 김춘수 시인 정치 참여 후회… 진정 문화의 힘을 믿어서 모셔갔나

김광일 논설위원
김광일 논설위원
19세기 독일 시인 루트비히 울란트가 말했다. "민주주의의 향유(香油)를 바르지 않은 머리는 빛나지 않는다." 그는 대중적 인기가 높았고 변호사와 의원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시인으로서는 생명이 일찍 끝났다. 울란트가 정치에 발을 들이려 하자 그보다 38세 많은 괴테가 말했다. "잊지 말게나. 정치인이 되면 시인으로서는 볼 장 다 본 것이나 같네. 의원으로서 매일 다툼과 흥분 속에 산다는 게 시인의 섬세한 천성에 맞기나 한 일인가. 시 쓰는 일도 그만두게 될 테니 정말 애석하네."

우리 시단에서도 정치에 입문하는 시인이 매끄럽게 안착하는 경우가 드물다.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의원이 된 도종환 시인은 정치적 영향력을 쌓기도 전에 자신의 시 '담쟁이' 때문에 괜한 논란부터 겪었다. 이 시가 교과서에 실린 것을 두고 지난 7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정치적 중립성'을 들어 시비를 붙였다. 도 시인은 "김춘수 시인도 11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이었는데 온 국민이 사랑하는 그의 시 '꽃'을 교과서에서 빼야 하느냐"고 반발했다. 대부분 국민이 도 시인 편을 들었다.

2004년 김춘수 시인이 세상을 뜨기 몇 달 전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도 시인보다 32세 많은 김 시인은 1980년대에 국회의원을 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전두환 정권 때 민정당 고위직 사람이 나를 징용하듯 데리고 갔습니더. 그것은 참 강제적인 상황이었습니더." 김춘수는 대표시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도종환 시인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고 썼다. 두 시인은 정치적 자발성에서 사뭇 달랐다.

그제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가 시인·소설가·평론가 30여명이 포함된 멘토 이름을 내놓았다. 그걸 문인들의 '정치활동'이라고 불러도 되는지는 모르겠다. '조언자(助言者)'라는 뜻의 멘토(mentor)가 선거판에서 실제 무슨 일을 하는지도 궁금하다. 신문 제목에는 유명 문인 이름이 줄줄이 보였다. 제 발로 참여한 사람도 있고 권유를 받고 이름을 올린 사람도 있다. 문단에서 존경받는 원로도 여럿 보였다. 똑같은 문학단체장을 맡았던 분들도 있어서 어떤 '문학적 진영(陣營)'을 느끼게 했다.

이 당에서 안도현 시인은 대통령 후보의 공동선대위원장이다. 그가 선대위 워크숍에서 "(안철수 무소속 후보가 일으킨) 태풍의 방향이 소멸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 형세가 아닌가 한다"고 했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 그의 서정 넘치는 시를 사랑해온 독자로서 조금 낯설었다. 무소속 안철수 후보가 대선 출마를 발표하던 회견장에는 소설가 조정래씨가 맨 앞에 앉아 있었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최근 소설가 이외수씨를 찾아갔다.

이번 대선에 나선 중요 후보들이 문학이나 영화 혹은 다른 대중문화에 대해 정색을 하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이 쏟아내는 정책 비전 목록에 아직 '문화' 항목은 없다. 그들이 '강남스타일'과 말춤을 두고 농담을 하는 것은 봤지만 전략적 국가 브랜드 자원(資源)이라고 말하는 것은 듣지 못했다. 영국 작가가 쓴 판타지 소설 '해리포터'는 한때 삼성전자만큼 벌었다. '강남스타일'의 브랜드 가치는 서울 강남에 있는 부동산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을 낼 수 있다. 문화가 농담인가.

괴테는 못내 아쉬워했다. "슈바벤 지방에는 인물들이 많네. 다들 의회에 나설 만큼 교양도 있고 좋은 뜻도 지녔고 말솜씨도 뛰어나지. 하지만 울란트 같은 시인은 단 한 사람밖에 없다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다. 대선 후보들이 문인들을 모셔갔다면 '문화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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