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백제 총장

1999년 9월 서울 한 호텔의 뒷마당. 조백제(74) 서울디지털대 총장과 임계순(68)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 부부의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모였다. 참석자들은 "오늘 저녁 한 끼 대접할 테니 꼭 참석해달라"는 말을 듣고 가볍게 왔다. 막상 와보니 조 총장 부부가 장남 상준(42)씨를 결혼시키는 자리였다. 하객은 양가 합쳐 70명이 전부였다. 간략한 주례사와 결혼 서약, 만찬이 이어졌다. 70명이 식사하는 조건으로 뒷마당 사용료는 무료였다. 신부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랑은 평소 입던 양복을 입었다. 결혼식 비용은 총 700만원이었다.

그로부터 7년 뒤 차남인 남준(40)씨도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식으로 결혼했다. 부부가 직접 서울 양재동 꽃시장에 가서 사온 꽃으로 야외 식장을 꾸미고, 신부의 여동생 친구들이 축가를 불렀다. 장남 결혼식 때와 마찬가지로 축의금은 정중하게 사양했다. 하객들은 작별하면서 "이런 뜻깊은 자리에 불러줘서 고맙다"며 혼주들의 손을 잡았다.

세 아들 중 위로 둘을 '작은 결혼식'시킨 조 총장 부부에겐 아직 결혼 안 한 막내아들(35)이 있다. 부부는 "막내도 같은 방식으로 결혼식을 할 것"이라며 본지와 여성가족부가 펼치는 '1000명의 작은 결혼식 릴레이 약속' 캠페인에 동참했다.

임 명예교수는 "신랑·신부가 결혼식 주인공인데, 요즘 우리나라 결혼식은 마치 혼주들이 주인공인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장남을 장가보낼 때 작은 결혼식을 치르자고 제안했더니, 사돈이 '무슨 비밀결혼도 아닌데 주위에서 뭐라고 하실지 모르겠다'고 걱정하셨어요. 그때만 해도 작은 결혼식이 드물었으니까요. 우리 부부를 보고 '출마하려고 그러느냐'는 분까지 계셨죠. 차남 때는 훨씬 쉬웠어요. 그새 사회가 많이 변해서, 사돈도 한결 쉽게 동감하시더라고요. 우리 결혼 문화가 잘못됐다고 걱정하는 분이 많지만, 저는 변할 수 있다고 봐요.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조 총장은 현대상선 대표이사와 한국통신 사장을, 임 명예교수는 한양대 인문과학대학 학장과 백남학술정보관장을 지냈다. 혼주 내외의 이력이 이 정도면, 자녀 결혼식에 하객이 1000명 넘게 몰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은 게 현실이다.

하지만 부부는 청첩장을 따로 만들지 않았다. 양가가 각각 꼭 모셔야 할 하객을 30명 남짓 선정해서 일일이 전화로 결혼 소식을 알렸다. 임 명예교수는 "청첩장을 받고 억지로 오시는 분이 많으면, 그분에게도 폐가 되고, 신랑·신부를 축복한다는 결혼식 본래의 의미도 없어질 것 같았다"고 했다.

임계순 한양대 명예교수는 서울의 한 호텔 뒷마당을 무료로 빌려 예식장으로 사용하고 직접 꽃 장식을 해 아들 셋 중 두 명의 결혼식을 치렀다. 하객은 친지 중심으로 60~70명만 초청했다. 임 명예교수는 “첫째와 둘째 아들 모두 소박하게 결혼시켰고, 막내아들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했다. 임 명예교수의 남편인 조백제 서울디지털대 총장은 “결혼식을 소박하게 치르는 것은 당연하고,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다”며 사진 촬영을 한사코 사양했다.

임 명예교수는 1996~2004년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을 맡았다. 예단에서 비롯된 고부간의 갈등 사례를 자주 보았다. 그때 '나부터 내 아들 결혼시킬 때 예물·예단을 생략하고 두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식을 치르자'고 결심했다. 부모가 결혼식부터 신혼집 마련까지 다 해결해주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수치'라고 생각했다. 이 집 삼형제는 모두 유학 중에는 월세방에 살고, 한국에 오면 직장 사택에 들어갔다.

임 명예교수는 "우리나라 결혼 문화가 바뀌려면 여자들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혼사를 앞둔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가 '진정으로 행복한 결혼식'이 뭔지 생각해보시면 좋겠어요. 신부 될 사람들도 '시댁에서 뭐 받았다'고 자랑하고 싶은 허영심을 버려야 하고요."

최근 막내아들에게 혼담이 오가는 상대가 생겼기에 부부가 앞서 두 아들을 결혼시킨 호텔에 알아봤더니, 호텔 직원이 "그때처럼 직접 꽃을 사다 꾸미시면 안 된다"면서 자기네가 정해놓은 대로 값비싼 꽃 장식을 하라고 했다. 부부가 "그럼 꽃 장식은 생략하고 식사만 대접하겠다"고 했더니, "그건 곤란하다"는 답변이 왔다.

"씁쓸했어요. 그래도 저희 부부는 어떻게든 작은 결혼식을 치를 겁니다. 지인들이 저희 집 결혼식을 보시고 '나도 똑같이 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되더라'는 말씀을 가끔 하세요. 사돈이 싫어해서 못 한 경우, 아이들이 '화려하게 해달라'고 떼를 쓴 경우…. 막상 해보면 참 만족스럽답니다. 우리 며느리 친구들 중에 화려하게 결혼식 한 사람들이 '다시 할 수 있다면 너처럼 하고 싶다'며 후회하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