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고(故)정서운 할머니는 일본군에게 반항한 죄로 주재소에 갇힌 아버지를 풀어주겠다는 동네 이장의 말에 속아 강제위안부로 끌려갔다. 그녀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8년간 능욕을 당하는 동안 아버지는 주재소에서 돌아가셨다.
술에 취한 일본 장교에게 처음으로 강간을 당한 뒤 성관계를 거부하자, 일본군은 그녀에게 아편 주사를 투여하기 시작했다. 아편에 취한 그녀는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다시 일본군을 상대해야만 했다.
"숫자도 헤아릴 수 없고 토요일 일요일에는 말도 못해. 줄을 서 가지고 옷도 안 벗고. 아이고, 그 말을 어디다 다 할꼬."
당시 소녀는 열네살. 누워 있는 소녀의 눈앞으로 남자의 얼굴이 여럿 바뀐다. 지난 21일 개막한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출품작 '소녀이야기'의 한 장면이다.
영화 '소녀이야기'는 강제위안부 여성들의 실제 육성을 토대로 3D 영상을 입힌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잔혹했던 강제위안부의 소녀 시절을 담고 있다.
영화를 연출한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애니메이션과 겸임교수 김준기 감독은 "故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강제위안부를 고발했던 1991년에 저는 만화를 배우던 학생이었어요. 그때 강제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만화를 그리고자 다짐했죠"라고 말했다.
그렇게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이야기는 2008년 본격적으로 시작해 3년의 제작기간을 거쳐 완성됐다.
하지만 '소녀이야기' 제작은 순탄치 못했다. 김 감독이 강제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듣기 위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를 찾아갔지만 반기는 이가 없었다. 그동안 강제위안부를 다큐멘터리로 만들겠다고 찾아온 이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결국 김 감독은 1년 동안 시범 영상을 제작해 설득했고, 정대협과 할머니들은 여러 증언 자료를 제공해줬다. 그 중 故정서운 할머니의 사연을 토대로 '소녀이야기'가 그려졌다.
영화 제작에 가장 공을 들인 것은 캐릭터와 故정서운 할머니 목소리의 립싱크였다. 김 감독은 "맨 처음 할머니가 등장했을 때 단지 3D 캐릭터로만 보이지 않고 사실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랐어요"라며 "자칫 애니메이션이 허술하면, 할머니의 이야기가 허구인 양 비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라고 말했다.
이처럼 영화 '소녀이야기'는 강제위안부에 대해 사실 그대로를 관객들에게 전하려 한다. 당시 일본어를 모르던 故정서운 할머니가 느꼈던 공포감이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되도록, 영화 속 일본군들의 대화도 한국어로 자막처리하지 않았다.
김 감독은 "강제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그들의 푸념이나 정치적인 행보로 해석하지 말고, 그분들이 겪었던 것을 영화가 아닌 사실로 받아들이면 좋겠어요"라며 "모든 국민이 조금 더 관심을 두고, 강제위안부는 꼭 해결돼야 할 문제라는 것을 염두에 두길 바란다"고 말했다.
지난 8월 광복절 강제위안부 정기 수요집회는 1,035회를 넘어섰고, 일본군 강제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한 헌재의 판결 이후 1년이 지났다. 그러나 일본은 "강제위안부 강제동원 증거 없다", "강제위안부문제 이미 해결됐다"는 답변만 내놓으며 책임을 외면하고 있다.
그 사이 고령인 강제위안부 피해자들은 하나둘씩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 신고한 강제위안부 피해자 234명 중 현재 생존자는 60명뿐. 지난해만 15명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생존한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영화 '소녀이야기'는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볼 수 있다.
경기도가 주최한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는 '평화·소통·공존·생명'이라는 기존 주제를 확장해 강제위안부를 비롯한 입시경쟁 과열, 노인 문제, 사법계의 부조리, 빈곤, 환경문제 등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가지 문제를 파고든 작품을 특히 주목했다.
영화제 기간 전 세계 36개국 115편이 상영되며, '폴란드 다큐멘터리의 촬영기법'을 주제로 한 마스터클래스와 김중만 사진작가의 'DMZ People' 사진전 등 다양하게 진행된다.
올해로 4회를 맞은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는 9월 27일까지 롯데시네마 파주아울렛점, 출판도시 메가박스, 파주 출판도시 일대에서 상영할 예정이다. 자세한 내용은 공식홈페이지(http://www.dmzdocs.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
※ '강제위안부'란 일본 제국주의 점령기에 일본에 의해 군 위안소로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일컫는다.
기존에 쓰던 ‘종군위안부’라는 표현에는 당시 실태의 강제성이 분명히 드러나지지 않아, 본문에서는 ‘강제위안부’ 또는 미국과 유럽에서 일본군에 끌려갔던 한국·동남아 여성들을 일컫는 ‘성노예(sex slave)’라는 표현을 병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