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외국 국기 모독

조선일보
  • 박해현 논설위원
  • 김도원
    입력 2012.09.24 23:30

    2011년 일본 극우 단체가 도쿄 주재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쿠릴열도 반환 시위를 벌이다 러시아 국기를 찢고 낙서했다.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쿠릴열도를 방문하자 두 나라 외교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은 때였다. 일본 형법에 일장기 모독죄는 없지만 '외국 국기 모독죄'는 있다. 형법 92조에 '외국에 모욕을 가할 목적으로 국기나 국장(國章)을 손괴(損壞), 제거, 훼손한 자는 2년 이하 징역이나 20만엔 이하 벌금에 처한다'고 했다. 러시아는 일본에 범인 체포를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외국 국기 모독죄는 외국 공관에 걸린 국기에 해당하므로 수사 대상이 아니다"고 발뺌했다. 극우 단체가 갖고 온 러시아 국기여서 문제가 없다는 억지였다. 러시아에선 외국 국기 모독은 무조건 형사 처벌 대상이다. 화가 치민 러시아 외교부는 한 달 뒤 모스크바 주재 일본 공사를 불러 다시 수사를 촉구했지만 일본은 똑같은 이유를 들어 거부했다. 러시아 정부는 "범죄를 묵인하는 것"이라고 비난한 뒤 일본 우익 단체 간부의 러시아 입국을 금지하는 선에서 분을 삭였다.

    ▶나라마다 외국 국기 모독죄는 다르다. 독일과 대만에선 자기 나라 국기와 똑같이 외국 국기 모독을 다룬다. 덴마크에선 자기네 국기는 태워도 괜찮지만 외국 국기를 불태웠다간 형법 110조에 따라 처벌한다. 덴마크 의회는 이 법을 만든 이유가 "외교 관계가 나빠질 것을 염려해서"라고 밝혔다. 일본도 덴마크와 똑같은 법조문을 지니고 있지만 극우파가 버젓이 외국 국기를 모독하고 다닌 지 오래됐다.

    ▶지난 6월 말과 7월 말 일본 극우 단체가 반한(反韓) 시위를 벌이며 태극기를 짓밟았다. 한일 국교 단절을 주장하며 도쿄 번화가 신주쿠에서 행진을 끝낸 뒤 태극기를 찢고 밟았다. 이들은 태극기 사괘(四卦)를 바퀴벌레처럼 그려 한국인을 곤충으로 비하했다. 태극 문양은 '펩시콜라'라고 조롱했다. 극우파는 23일에도 욱일승천기를 든 채 바퀴벌레를 그려넣은 태극기를 밟고 지나가는 행진을 벌였다.

    ▶1600년대 기독교 탄압을 그린 일본 소설 '침묵'은 사무라이들이 예수 초상화를 밟고 다녔다고 묘사했다. 사무라이들은 예수 초상화를 밟지 않는 일본 기독교도는 그 자리에서 목을 벴다고 한다. 남을 밟아야 쾌감을 느끼는 가학(加虐) 본능이 일본인 유전자 속에 여전히 흐르고 있는 것일까. 나라 사이에 다툼이 있더라도 상대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는 능멸하지 않는 게 마지막 선을 지키는 일이다. 일본 문화에 진작부터 엽기와 괴기 요소가 많았다곤 해도 요즘 일본 열도는 급기야 거대한 벌레로 변해 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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