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스위스 기차역 시계

조선일보
  • 김광일 논설위원
  • 김도원
    입력 2012.09.23 23:30

    1944년 스위스 연방철도국은 기술직 직원 한스 힐피커에게 기차역 시계를 디자인하라고 주문했다. 무조건 '정확하고' '(멀리서도) 잘 보여야 한다'는 두 조건을 달았다. 힐피커가 만든 둥근 시계판은 단순 강렬했다. 아라비아숫자가 없고 흰 바탕에 빙 둘러 검은 선 60개를 그어 분(分)을 표시했다. 5분 단위 표시 선은 조금 더 굵게 칠했다. 시침·분침은 그저 뭉툭한 검은 막대다. 초침만 긴 숟가락처럼 생겼고 빨갛다. 이 초침을 '뢰테 켈레(빨간 숟가락)'라고 불렀다.

    ▶역장들은 뢰테 켈레가 시계판 윗부분 한가운데 오면 출발 신호기를 흔들었다. 거기에 맞춰 기관사도 열차를 움직였다. 이 때문에 뢰테 켈레는 다른 시계로 치면 숫자 12가 새겨진 곳에서 1초가 아닌 1.5초를 머무르도록 설계돼 있다. 오랜 세월 뢰테 켈레는 스위스 철도망과 기차들을 빈틈없이 통제했다. '스위스 기차역 시계'는 명문 시계 회사들을 누르고 국가적 상징이 됐다. 출퇴근 승객도, 외국인 관광객도 뢰테 켈레에 손목시계를 맞췄다.

    ▶요즘 열차 출발은 컴퓨터 제어시스템으로 자동화됐지만, 아직도 뢰테 켈레가 정확히 '12' 자리에 와서 멈출 때 열차 바퀴가 구르기 시작한다. 열차 좌석까지 손님을 배웅한 전송객들은 창밖으로 '빨간 숟가락'을 흘끔거리다 기차가 떠나기 직전 승강장으로 내려선다. 오래전 스위스 정부는 기차역 시계를 '10대 스위스 시계 디자인'으로 선정했다. 런던 디자인박물관과 뉴욕 현대미술관도 이 시계를 20세기 최고 디자인 중에 하나로 꼽았다.

    애플이 새 운영 체제 iOS6와 함께 내놓은 시계 애플리케이션이 힐피커 시계 디자인을 그냥 훔쳤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흰색 시계판에 분 단위 검은 선들, 시침·분침용 검은 막대, 빨간 초침까지 색깔과 형태가 똑 닮았다. 누가 봐도 '베꼈구나' 하는 느낌을 준다. 스위스 언론이 들고 일어났고, 연방철도국도 소송을 내겠다고 별렀다. 애플과 스위스 연방철도국 사이에 라이선스 협약도 없었다니 애플이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애플은 삼성이 자기네 스마트폰 디자인을 베꼈다며 소송을 걸었다. "전반적인 외형과 제품 이미지가 비슷하다"고 했다. 삼성 폰이 애플 폰 겉모습을 본떴다고 시비가 붙는 데 비하면, 애플 시계는 스위스 기차역 시계를 숫제 그대로 베꼈다고 해야 옳다. 시계 업체는 디자인에 사활을 건다. 기능과 신소재 못지않게 독창성과 단순함을 따진다. 좋은 디자인에 세월이 녹아들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신뢰'가 생긴다. 애플이 유죄라면 그건 '신뢰'를 훔친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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