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는 노무현 정권 때 민정수석 두 차례, 시민사회수석 한 차례, 정무특보 한 차례에 이어 비서실장을 지냈다. 특히 민정수석은 친·인척 및 정부와 청와대 고위직 감찰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비서실장은 이를 총괄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5년 동안 크고 작은 부패 사건들이 터졌다.

◇소방헬기에 가족 태우고 시찰한 사건까지

2003년 6월 청와대 비서진이 공휴일에 가족을 소방헬기에 태우고 새만금 시찰을 나서 기강 해이 논란이 일었다. 지금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당시 민정수석실은 구두 및 서면 경고조치로 사태를 마무리하려 했다. 하지만 언론 보도로 사태가 확산되자 뒤늦게 비서관급 3명의 사표를 수리했다.

같은 달 양길승 청와대 제1부속실장은 노 대통령의 청남대 반환 행사 수행차 청주에 내려갔다 살인교사 혐의 등으로 수사를 받고 있던 나이트클럽 사장 등으로부터 술자리 향응을 받았다. 자체 조사를 한 문 수석은 "술자리에서 청탁은 없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검찰 수사 결과 "수사 무마 청탁을 했다"는 진술이 나왔고, 결국 재조사가 실시되며 사건 무마 청탁과 선물 제공 정황이 드러났다. 문 후보는 "청탁이 있었다면 우리로선 씁쓸한 일이겠죠"라고 말했다.

2003년 8월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의 SK 비자금 수수 사실이 드러났을 때도 문 후보는 훗날 "내가 문책 대상이라 (그때) 사퇴를 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2003년 말 이광재 전 대통령국정상황실장이 썬앤문 그룹에서 대선 자금으로 1억500만원을 받았다고 직접 시인하기 전 그를 조사했던 문 수석은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 후보는 부산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자신의 측근에 해당하는 정윤재 전 의전비서관의 뇌물 수수 사건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정 전 비서관은 2007년 건설업자로부터 1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는데, 당시 노 대통령조차 이러한 사실을 사전에 보고받지 못해 "깜도 안되는 의혹이 춤추고 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정 전 비서관은 노무현재단 사무처장을 하던 때인 지난 1월에도 2007년 저축은행 관계자로부터 1억원을 받은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구속돼 2심에서 징역 10월을 선고 받았다. 당시 문 후보는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었다.

◇"도덕적 결벽주의의 역효과"

특히 노 대통령의 형 건평씨에 대한 관리 부실은 지금까지도 부담으로 남아 있다. 임기 시작과 동시에 국세청장 인사 개입 논란을 일으킨 건평씨는 대우건설 사장 연임 청탁과 함께 3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2004년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세종증권 매각 로비에 개입해 29억원을 받았다가 2010년 1월 대법원에서 또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의 거래 등으로 '봉하대군'으로 불린 건평씨에 대해 민정수석실은 "1대1 마크를 한다"고까지 했지만 결과는 민정 기능의 부재를 그대로 드러낸 대표적 사례가 됐다.

2005년 3월 부산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건평씨의 외아들 결혼식에 참석한 문재인(왼쪽)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 혼주 건평씨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2004년 1월 건평씨의 처남인 민경찬씨가 사설 펀드로 두 달 만에 653억원을 모집해 논란을 일으켰다.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은 사전에 민경찬씨에게 중단토록 경고조치를 내린 상태였으나 민씨가 강행해버렸다.

문 후보는 지난해 출간한 '문재인의 운명'에서 "청와대 역시 수사권이 없어 더 파고들 수 없었다"며 "사전에 막지 못했다는 지적은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역시 권양숙 여사와 딸 정연씨 문제였다. 문 후보는 박연차 회장이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을 통해 권양숙 여사에게 불법 자금을 제공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파장은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권 여사가 2009년 1월 13억원을 환치기해 제삼자를 통해 딸 정연씨에게 전달한 자금도 그런 돈의 흐름과 연결됐을 가능성이 있다. 이번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문 후보를 향해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다른 후보들의 공격이 이어진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민주당 의원들 중에는 "문 후보의 도덕적 결벽주의가 재임 시절 다양한 여론 수렴을 어렵게 했고 결과적으로 역효과를 낳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