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미래] 잿빛 피란민 마을… 주민이 예술로 되살렸다

입력 2012.09.11 03:09

'마을 살리기' 민·관이 손잡은 부산을 가다
6·25 피란민 살았던 부산 동구 빈집 마을 알록달록 리모델링해
부산시와 지역주민의 협업·소통 이뤄진 결과

두 사람이 지나가기에도 힘들 만큼 좁다란 비탈길 양쪽으로 집들이 빼곡했다. 알록달록한 철제대문의 칠은 곳곳이 벗겨졌고, 인적이 드물어 조용했다. 골목길 사이로 올라가니 25평 남짓한 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청년 20여명이 고추·상추 모종을 심은 텃밭상자를 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부산지역 미술·디자인학과 학생들이 모여 만든 청년 사회적기업팀 '아코아'와 마을기업 '인사이트영'의 공동프로젝트 현장이다.

이곳은 부산 동구청 뒤쪽에 위치한 수정동. 6·25 전쟁 당시 몰려왔던 피란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곳이다. 동구에만 이렇게 버려지거나 빈집들이 600채가 넘는다. 아코아 대표 김종흠(30)씨는 "빈집에 쓰레기가 쌓이고 노숙자나 비행청소년들이 들어와 자는 등 슬럼화되면서 각종 문제가 생겼다"며 "빈집을 아름답게 리모델링하고 텃밭을 꾸며 마을을 재생하는 게 우리의 일"이라고 말했다.

부산시의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 대표 추진지역인 감천문화마을(사하구 감천2동). 올해에는 ‘아시아 도시경관상’을 수상했다.
부산시의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 대표 추진지역인 감천문화마을(사하구 감천2동). 올해에는 ‘아시아 도시경관상’을 수상했다.
아코아는 마을기업 인사이트영과 함께 '물탱크 텃밭'도 꾸미고 있다. 쓰지 않고 방치된 옥상의 물탱크를 잘라서 예쁜 무늬로 칠한 다음, 미니 텃밭으로 만드는 것이다. 김씨는 "물탱크는 철거비용을 주민들이 내야 하기 때문에 쓰지도 않으면서 방치된 것이 부산에만 23만개나 된다"며 "물탱크 아랫부분에 바퀴를 달아 마을 곳곳에 배치해 주민들이 공동으로 텃밭을 가꾸게 했다"고 말했다. 인사이트영 운영위원이자 마을 만들기 계획가인 안효득(43)씨는 "텃밭을 중심으로 주민공동체를 만들 수 있고, 생산된 작물을 팔 수도 있고, 생태자연학습장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부산 주민의 높은 니즈

문화예술을 통해 쇠락해가는 지역사회를 되살리는 부산의 시도가 주목받고 있다. '또따또가'가 대표적이다. 이곳은 부산시가 원도심인 중구 중앙 동 40계단 주변과 동광동 빈 상가 18곳을 예술가들의 창작공간으로 임대, 현재 370여명이 입주해있다. 예술가들이 들어오자 마을엔 각종 합창공연, 전시회, 영화상영 등이 이뤄졌고,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자 주변상권까지 활성화되고 있다. 부산시 사하구 감천2동 '감천문화마을'도 유명하다. 아트숍과 카페, 북카페, 갤러리 등 산동네 골목길 곳곳을 개조해 예술로 재탄생시켰다. 지난해 방문객은 3만명, 올해는 5만명을 훌쩍 넘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마을 목욕탕 건물을 리모델링한 커뮤니티센터 '감내어울터'를 오픈했다.

부산의 지역 재생이 성공적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우선 부산이라는 도시의 특성을 꼽고 있다. 부산은 꼬불꼬불한 산복도로 마을이 많다. 피란민들이 산을 깎아 집을 지어 살다가 떠난 흔적이다. 김형균 부산시 창조도시본부장은 "부산은 100만 명이 넘는 피란민들을 받아들이면서 도시 자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팽창해버렸다"며 "주인을 알 수 없는 집이 많고 사유 재산을 함부로 처분하기도 곤란해 도심 자체를 완전히 재개발하거나 재건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도시재생 계획에 주목했다. 해외에선 이미 도시재생으로 변신한 성공사례가 많다. 영국의 대표적 우범지역이 최첨단 문화예술의 메카로 변신한 해크니 지역, 캐나다의 쇠락한 공장지대였던 그랜빌 아일랜드가 극장과 대학캠퍼스, 스튜디오, 갤러리 등으로 변신한 사례 등이 그것이다.

‘아코아’의 청년 작가들은 물탱크를 잘라 그림을 그린 후, 텃밭으로 만드는 작업을 한다. / 아코아 제공
‘아코아’의 청년 작가들은 물탱크를 잘라 그림을 그린 후, 텃밭으로 만드는 작업을 한다. / 아코아 제공
◇유기적인 민·관 협력 시스템

부산시와 현장실무자들의 '소통'과 '협업' 또한 남달랐다. 부산시에서는 2010년에 창조도시본부를 만들어 도시재생 문제를 본격적으로 풀기 시작했다. 부산 6개구, 54개동, 63만4000명을 대상으로 하는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은 2011년부터 10년 동안 15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할 예정이다. 무려 부산 주민 20%를 대상으로 한 사업이다.

관과 주민들의 파트너십이 잘 이뤄지는 편이다. 김형균 본부장은 "서울의 경우 대개 도시계획 엔지니어링 회사나 도시계획 전문 교수들이 해당 마을로 들어간다"며 "하지만 우리는 마을계획가와 마을활동가가 각각 1명씩 투입돼 주민 리더와 소통한다"고 말했다. 복지기관에서 사회복지사들을 마을로 보낼 때 '활동가'로 투입하는 걸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마을활동가들의 전공은 건축·도시계획·인문·시민운동·자활공동체 등 다양하다. 부산에는 현재 총 50명 정도의 마을활동가가 있다.

지자체 중에서는 최초로 마을 만들기와 관련해 계약직 공무원도 채용했다. 6개월~1년 단위로 순환보직이 바뀌는 공무원 사회에서 파격적인 선택이다. 전담 공무원이 있다 보니 업무 진행과 의사소통이 훨씬 빠르다. 서울대 공대 협동과정 대학원에서 도시설계학을 전공한 태윤재 연구원(부산시 창조도시본부)은 "마을 만들기가 3년째인데 정책적으로 탄력을 받고 있다"며 "다만 단순인건비 지원보다 사회적기업, 마을기업이 자생할 수 있도록 활동할 필드를 열어준다거나 지속적인 컨설팅을 통해 경제력을 키워주는 등 복합적인 정책적 고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청년 사회적기업팀 ‘아코아’의 김종흠 대표, 마을기업 인사이트영 안효득 운영위원(왼쪽부터).
청년 사회적기업팀 ‘아코아’의 김종흠 대표, 마을기업 인사이트영 안효득 운영위원(왼쪽부터).
◇마을기업과 사회적기업이 만나니…

마을기업과 사회적기업이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니 시너지 효과가 나기도 한다. 아코아는 사회적기업 청년팀이다 보니 네트워크가 약한 편인데, 마을기업 인사이트영과 함께 프로젝트를 하면서 사업의 기회가 한층 더 많아졌다. 조영복 사회적기업연구원장(부산대 경영학과 교수)은 "부산은 사회적기업 관련부서를 거의 최초로 만들었을 정도로 부산시장뿐 아니라 여론지도층이 사회적 경제에 굉장히 긍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며 "사회적기업연구원에서 마을기업을 대상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일자리를 찾는 경영컨설팅을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마을기업 인사이트영에서는 20여명의 할머니들이 직접 손으로 머리핀, 귀고리 등 액세서리를 만들어서 팔아 작은 돈이지만 월급도 받는다. 고철 더미를 줍는 정도가 일이었던 할머니들에게도 일감이 주어지는 등의 변화가 이뤄진 것이다.

전문가들은 마을 공동체를 복원하고 '마을 만들기'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정책 디자인이 세밀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마을마다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일괄적인 지원정책은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중요하다. 산복도로 마을 만들기 활동가이기도 한 정덕용 연제지역자활센터장은 주민들의 주인의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앞집 수퍼에서 라면을 사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예전엔 내가 라면을 산 돈으로 앞집 아이가 공부를 할 수 있었어요.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죠.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마을'의 의미를 회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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