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결혼한 김찬수(가명·31)씨는 주위에서 '예단 때문에 싸웠다'는 소리를 들으면 '돈을 밝히는 사람이라 그런가 보다' 했다. 자기 어머니는 명품도 모르고 돈 문제에도 초연해 아무 문제 없을 줄 알았다. 현실은 그의 예상을 깼다. 예단으로 현금 1200만원이 들어오던 날 김씨의 어머니는 "사돈이 너무 염치가 없다"고 벌컥 화를 낸 것이다.

"신혼집 전세금이 2억5000만원이었거든요. 어머니가 '나는 평생 모은 재산을 뚝 떼어 지원했는데 1200만원이 뭐냐'고 화를 냈어요. 어머니 친구들이 '집값이 얼만데 신부가 그걸 거저먹으려 드느냐' '집값이 옛날과 달라졌는데 여자 쪽도 최소한 집값 10%는 현금을 해와야 한다'고 부추겼어요."

대기업 직원 박경수(가명·29)씨는 지난달 어느 휴일 아침 여자 친구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저쪽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빙빙 돌려서 말했지만 결국 이런 뜻이었다.

"자네 부모님이 신혼집 얻는 데 1억 정도 보태주실 수 있다고 하셨다면서? 자네 저축에 대출을 합쳐도 2억 안팎인데, 그 돈으론 좋은 동네에 못 사네. 요즘은 우리 때와 달라서 서울 강남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어지간히 잘나도 자기 힘으로는 절대 강남에 못 들어오네. 내 딸은 쭉 강남에서 자랐기 때문에 앞으로도 여기 살아야 하네. 헤어지는 게 서로에게 좋네."

박씨 커플은 헤어졌다.

김씨의 어머니와 박씨의 예비 장모가 유별나게 돈을 밝히는 사람들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요즘 한국 사회에서 이 정도 이야기를 듣는 일은 드물지 않다.

지난 3월 '부모의 눈물로 울리는 웨딩마치' 시리즈를 시작한 뒤 취재팀은 결혼을 앞두고 갈등을 겪는 사람, 끝내 헤어진 사람, 간신히 결혼했지만 앙금이 남아 괴로워하는 사람을 많이 만났다. 그들 중에는 유별나게 괴팍하거나 성격이 모난 사람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보통사람들 입에서 모진 말이 튀어나오는 근본 원인은 대부분 돈 문제였고, 돈 문제는 결국 집 문제였다.

강민석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부동산팀장은 "IMF 외환위기 후 2~3년에 한 번씩 집값이 폭등했을 뿐만 아니라 최근 수년간 부모 세대가 사는 중대형 주택 가격은 주춤한 상황에서 20~30대가 독립하는 토대가 돼야 할 소형 주택은 계속해서 값이 올랐다"고 했다.

그 결과 '어차피 부모 지원 없이는 결혼할 수 없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졌다. 멀쩡한 젊은이들 입에서 "요새 자기 힘으로 벌어서 신혼집 얻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는 소리가 부끄럼 없이 튀어나온다.

취재팀이 최근 두 달간 갓 결혼했거나 결혼 날짜를 잡은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인터뷰한 결과 대다수가 신혼집 얻는 비용을 전부 혹은 절반 가까이 부모에게 기댔거나(77쌍 중 48쌍) 부모 집에 들어가서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7쌍).

물론 자기 힘으로 아등바등 신혼집을 얻은 사람도 적지만 있었다(22쌍). 하지만 결혼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소신이 있거나 능력이 충분해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어려운 형편이었다"는 대답이 나왔다. 올해 5월 결혼한 박윤미(가명·26)씨도 그중 하나였다.

박씨의 남자 친구(28)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보험회사에 들어갔다. 주위에서 "잘 만났다"고 부러워했다. 덜컥 아이가 생겨 양가 어른들께 인사드리고 결혼 승낙을 받았다. 문제는 집값이었다. 남자 친구는 갓 취직해 여윳돈이라곤 달랑 1000만원뿐이었다. 양쪽 집안이 다 어려워서 도와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박씨의 어머니는 고민하는 딸에게 "너처럼 출발하면 얼마나 고생하는 줄 아느냐. 차라리 아기를 지우라"고 말했다. 박씨는 "결혼 전 석 달 동안 평생 운 것보다 더 많이 울었다"면서 "엄마 말이 가슴에 박혀 밤새 혼자 울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정말 지워야 하는 것 아닐까?' 싶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저축을 털고 대출을 받아서 간신히 경기도에 9500만원짜리 연립주택(50㎡·15평)을 얻었다. 대출 이자·원금을 내고 나면(월 170만원) 남는 게 거의 없는 살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