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이종범의 호남인물열전] [38]백비의 깊은 뜻… "맑고 텅 빈 마음을 기억하라"

조선일보
  • 이종범 조선대 사학과 교수
    입력 2012.09.10 03:07

    박수량

    1545년(인종1) 여름 햇무리 자욱하더니만 장마까지 길어 초가을 산하는 축축하였다. 식자들은 음기 차고 양기 숨으니 신하가 세고 임금은 약할 조짐이라고 걱정하였다. 기실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외척권신은 문정왕후를 업고 나라를 어지럽게 휘저었다.

    이때 모친상 마친 박수량(朴守良,1491∼1554)은 고향에서 편두통과 난청(難聽)에 시달렸다. 선대는 전북 태인에 살았지만 대호군(무반3품)이던 고조부 박연생(朴衍生)이 세조가 즉위하자 담양 추월산을 거쳐 장성 황룡에 터를 잡았다. 본관은 밀양.

    일찍이 홍문관 교리를 버리고 고부군수로 내려온 동향의 김개에게 배웠다. 연산군 막바지 호남에서 시작된 반정의거에 나섰던 걸사였다. 1513년 진사를 거쳐 이듬해 문과에 들고 경기도 광주 향교의 훈도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마침 목사는 성균관에서 훈화를 입었던 석학 김세필. 가르침은 깊었다. 충청도사 때는 관찰사 손중돈(孫仲暾)을 보좌하며 배움을 구했다. 이언적의 외숙으로 청백리였다.

    젊은 기상은 우렁찼다. 바다를 노래한 '망해부(望海賦)'에 풀었다. "가는 물줄기를 가리지 않으니, 기상의 관용 키워주네! 넓고 깊숙이 채웠다가 넘실대니, 마음의 덕성 북돋는구나! 모든 계곡 끌어당기니, 뭇 이치는 하나로 돌아가고, 한번 밀리고 한번 물러나니, 사물의 변화를 깨우치겠네!" 바다처럼 넉넉한 마음과 도량으로 살겠다는 것이다.

    박수량 묘역의 백비와 신도비.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호사마을에 있다. 1786년(정조 10) 박수량의 후손은 시호를 거듭 건의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뜻이 그렇지 않다며 무엄하다는 타박까지 받았다가, 1805년(순조 5)에야‘정혜(貞惠)’란 시호가 내렸다. 청백으로 절개를 지키는‘청백수절(淸白守節)’과 백성을 아끼며 즐거움을 같이한다는‘애민호여(愛民好與)’의 뜻이다. 그리고 1887년(고종 24) 송병선의 글과 최익현의 글씨를 받고 묘역 아래 신도비를 세웠다. /이종범 교수
    기묘사화를 거친 중년 이후는 달랐다. 문장도 짓지 않고 정책을 내세우지 않았다. 두주불사였지만 사교를 꺼려하였고 흔한 자호(自號)조차 없었다. 오직 부지런히 봉직할 따름이었다. 문관 인사를 맡는 이조와 국왕 학문을 주관하는 홍문관에도 들지 못했다. 그래도 사헌부·사간원·승정원을 거치며 종2품에 오르며 이름이 났다. 당대 국로(國老)로 으뜸 청백리였던 송흠이 살았을 때 "호남의 소탈 담백한 다음 재상은 박수량"이라 했다.

    1546년(명종1) 봄 조정의 부름을 받았다. "청렴 근면한 남녘의 으뜸 선비"로 존중받으며 호조와 형조판서, 한성부 판윤, 의정부 우참찬을 맡았다. 전라감사로도 내려왔다. 그러나 편치 못했다. 자식들이 셋집을 마다하였을 때였다. "시골 사람인 내가 우연히 성은을 입었지만, 너희가 서울에 무슨 집인가!" 또한 자주 타일렀다. "죽은 후에 시호를 요청하지 말고 비석을 세우지 말라!"

    그리고 한 섬도 못 된 곡식만 남기고 떠났다. 겉은 깨끗해도 속이 더러운 자들이 식은땀을 흐르고도 남을 청빈이었다. 국가의 특별한 부의로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비석은 아무 것도 새기지 못하고 그냥 세웠다.

    묘주의 생애를 적어 묻는 묘지문을 지은 김인후 또한 유언하였다. "비석에 을사년 이후 벼슬은 적지 말라." 명종 치세에 내려온 관직은 사후라도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을사사화로 형과 벗을 잃고 '취향(醉鄕)의 허수아비'를 자처한 속리산의 평생처사 성운(成運)도 단호하였다. "무덤을 알리는 표석조차 세우지 말라!"

    그렇다면 박수량은? 착한 선비가 쓰러지고 휘어지는 오욕의 세월, 정경 벼슬이 무슨 광영이며 청백리가 무에 대수롭겠는가? 혹여 벼슬과 명예에 기대지 말고 나의 마음을 기억하라, 하였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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