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42)은 소년과 남자의 경계선에 서 있는 배우다. 분명 몸과 머리는 다 컸는데 눈빛만은 언제나 아이의 그것처럼 흔들린다. '악마를 보았다'처럼 강하고 차가운 남자역을 맡든, '내 마음의 풍금'처럼 사랑에 빠진 순수한 청년을 연기하든 언제나 그랬다. 그런 그가 추창민 감독의 '광해, 왕이 된 남자'(19일 개봉)에서 예민하고 광기에 찬 조선 임금 '광해'와 순박하고 정의감 넘치는 '하선'의 1인 2역을 맡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최근 서울 한남동 한 카페에서 이병헌을 만났다. 그는 이달 중 브루스 윌리스, 헬렌 미렌 등이 출연하는 '레드2' 촬영을 위해 한국을 떠난다. 그는 "영화관에 가서 내가 나온 영화와 그걸 보는 관객들을 보는 게 큰 낙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러질 못해 아쉽다. 예전에는 내가 나온 영화를 서른 번쯤 본 적도 있다"고 했다.
―음담패설 하는 광대 연기는 의외다. 특히 '매화틀'(조선시대 왕의 변기)에 쪼그려 앉아있는 장면은 '이병헌'이라서 더 웃기더라.
"의외라고 생각하는 게 의외다. 배우 이외에 가수나 MC와 같은 다른 활동을 한다면 나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지만 나는 그걸 연기로만 온전히 보여줘야 한다. 연기할 땐 특정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지 않다."
―이 작품을 택한 이유는.
"소설책을 읽는 독자의 기분으로 시나리오를 읽는다. 내가 연기할 캐릭터를 신경 쓰면서 읽으면 제대로 못 읽는다. '광해'는 일단 재밌었다. '내가 한 나라의 리더가 된다면 어떨까' 혹은 '지금 내가 처한 환경이 너무 싫은데 이 나라의 리더가 돼서 바꾸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보지 않나? 영화에 자신을 대입하면서 통렬함과 대리만족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매화틀 장면, 그것 때문에 이 영화를 택한 것도 있다."
―영화 '지아이조'로 할리우드에서 안정적으로 데뷔했다.
"처음엔 지아이조 시나리오 세 장 읽는 데도 한 시간이 걸렸다. 사전을 찾아가면서 읽어도 의미를 모르는 대사나 지문이 많았다. 그때는 원작이 만화인 줄 몰랐기 때문에 '무슨 만화 같은 내용에 내가 복면 쓰고 쌍칼까지 휘두르며 날아다니는 역할이야?'라는 생각에 거절하려고 했다."
―그런데 왜 했나. 할리우드에서 계속 액션 연기만 하고 있는데….
"할리우드에서 인지도 하나 없는 내가 '나 이 역할 할래'하면 그게 미친놈이다. 난 거기서 '생짜'(완전) 신인이다. 지금은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내가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자생력이 생길 때까지."
―할리우드 진출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것 같다.
"많이들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계획한 적도 없었고, 할리우드 진출에 대해서도 수동적이었다. '지상만가' 찍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그는 이 작품에서 할리우드 진출을 꿈꾸는 무명배우를 연기했다) 운이 좋은 것 같다."
―얄미운 우등생이 할 법한 얘기다.
"사실이다. 난 20㎏씩 살 빼가면서 연기하는 그런 거, 못한다. 물론 노력을 하지만 다른 배우들도 다 열심히 하기 때문에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게 아니다."
―지난해 본지의 전문가 설문조사에서 '멜로 연기 1인자'란 평가를 받았다.
"정말 좋아하는 칭찬이다. 멜로 연기야말로 섬세한 표정으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니까. 대사를 안 하고도 내가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을 관객들이 받아들인다는 게 좋다."
―영화 말고는 대중에게 모습을 안 드러내는 편이다.
"연기 처음 시작했을 때 선배들한테 보수적으로 배웠다. 선배들은 '배우가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을 많이 드러내면 안 된다'고 했다. 관객들이 영화를 볼 때 '인간' 이병헌에서 영화 속 캐릭터로 몰입되는 시간이 짧아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연애(배우 이민정과 연인 사이)가 큰 화제였다. 자극적인 기사와 댓글도 많았고.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아는 나와 '배우 이병헌'의 간극이 큰 것 같다. 나도 내 기사와 거기 달린 댓글을 읽으면 내가 아닌 '어떤 사람'을 그리게 된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캐릭터를 그려나갈 때처럼. 문득 그게 내 얘기라고 생각하면….(한숨)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살았는데."
―그럼 지금은 신경을 쓴단 얘긴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다가) "신경이 안 쓰이면 어떻게 사람이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