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이종범의 호남인물열전] [37] 어두운 시대, 영화 거부하며 술과 공부…

조선일보
  • 이종범 조선대 사학과 교수
    입력 2012.09.03 03:08

    김인후 ②

    ‘문정공하서김선생진상(文正公河西金先生眞像)’. 작자 및 연대 미상 초상화의 판각본.“ 용모만 보아도 속세의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명종실록’의 사평이나“술 취해 부축받으며 산보하면 신선처럼 보였다”는 문인 정철의 회상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규경(李圭景)도‘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주저 없이“동국 제일의 풍채(風采)”라며 하서를 꼽았다.
    1545년(인종 1) 4월 하순 옥과현감 김인후(1510∼1560)는 서울로 올라갔다. 중국의 조문사절과 시문을 주고받을 제술관에 뽑힌 것이다. 이때 모화관에 거둥하는 임금을 뵈었다. 국상이라 사방이 온통 하얀데 천안(天顔)만 유독 누렇고 부어 있었다. 그동안 육즙마저 사양하여 옥체가 상했다지만 불길하였다.

    성균관 시절부터 속내를 텄던 노수신(盧守愼)에게 보냈다. "속마음은 멀고 가까움이 없는데, 하늘의 달은 비웠다 찼다가 하는군. 초가지붕 처마에서 지는 해를 우러르자니, 세도(世道)는 또다시 어찌될꼬?" 여기에서 지는 해 '낙일(落日)'은 '금상(今上)'이다. 망극지통(罔極之痛)을 예견하며 서로 부둥켰던 것이다.

    그리고 달포 만에 옥과로 귀임하였는데 곧바로 국상이었다. 7월 1일, 혼전에 가지 못한 죄스러움에 몸서리치도록 망곡(望哭)하였다. 천둥 번개가 전라도를 마구 흔들고 태풍이 휘몰아치던 18일 밤, 시름시름 앓던 막내딸이 마지막 숨을 넘겼다. "만사 아득한데 관 뚜껑을 덮고 나니, 이제 내게도 온갖 병이 밀려오겠구나."

    얼마 후 지난 거친 풍랑에 고흥반도로 표류한 중국인 일행이 옥과를 지났다. "큰비 뒤에 하늘이 주신 바람 타고 나뭇잎처럼, 만리 밖 맑은 가을 들판에 내렸구려." 포근하였다. 그러나 동병상련을 감출 수 없었다. "두 번 국상을 겪고도 죽지 못한 신세, 하늘 끝에 떨어진 만큼이나 진배없이 불쌍하다오."

    그런데 조정에서 들리는 소식이 참혹하였다. 주검이 쌓이고, 유배와 낙향이 잇따랐다. "어진 바람 온누리에 떨치자, 만물이 우쭐대며 춤을 췄었지. 갑자기 눈서리 휘몰아치자, 곧은 줄기 시들고 꺾이네. 뭇 새들 구슬피 울부짖다가, 날고 난들 어디에 깃들꼬? 어둘 녘 저문 구름 일면, 장대비 주룩주룩 퍼부을 터인데."

    어진 바람 '인풍(仁風)'은 인종의 정치, 눈서리는 외척권신의 무서운 공작과 음모로 읽으면 뜻은 오롯하다. 그렇다면 곧은 줄기는 사화를 당한 신료이며, 뭇 새는 화를 모면한 자신 같은 선비다. 그러나 살아서 슬퍼한다고 세월의 야만을 비켜나가기가 쉽지 않을 터, 정녕 자신을 추스르지 못했다.

    인종이 효릉에 묻힌 10월 15일, 망곡례를 올리고 몸져누웠다. 감사에게 병가를 얻고 관아를 떠났다. 순창 처가에서 겨울 나고 봄은 장성 본가에서 요양하였다. 그리고 후임 수령에게 사무를 인계하고 벼슬을 떠났다. 1546년 6월 한여름이었다.

    한동안 '취광(醉狂)'과 '광시(狂詩)'를 자처하였다. 술잔을 가리지 않고 회포 또한 거리낌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신은 또렷하였다. 화초 심고 물고기 기르고 약초 키우며 옛글을 다시 보며 후학과 공부하였다. 일찍이 인종이 선물한 '주자대전'도 착실히 살폈다. 그러다가 공맹사상과 성리철학의 핵심을 흥겹고도 간명하게 시문에 풀었다.

    그래도 해마다 인종의 기일이 가까우면 굳이 산란하여 앞산에 들어가 통곡하였다. "임은 서른, 나는 서른여섯, 새로 만난 기쁨 나누지 못하고, 한번 이별하니 화살이더이다. 한창 때 해로할 짝 잃고, 눈 어둡고 이 빠지고 머리는 하얗다오. 덧없이 몇 년인지, 여태껏 죽지 못했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