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이종범의 호남인물열전] [36] '묵죽도'에 새겨진 도덕문명정치의 꿈

조선일보
  • 이종범 조선대 사학과 교수
    입력 2012.08.20 03:07

    김인후 ①

    1543년(중종 38) 정월 초이레 한밤중 동궁전에 불이 났다. 윤원로·원형 형제의 도발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대사간도 분명히 밝혔다. "전하께서 허물없이 가까이하시니 저리 쉽사리 깔보고 날뛰는 것 아니겠습니까!" 중종은 대로하고 대사간은 파직이었다. 범인은 잡힐 리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자는 한껏 낮추었다. "부덕한 몸이 참람하게 동궁에 있어 하늘이 재앙을 내렸다." 그러면서 아련한 심사를 묵죽도에 담아 세자시강원에 갓 들어온 신료에게 내렸다. 김인후(金麟厚·1510∼1560)였다. 장성군 황룡면 맥호동 태생으로 본관은 울산.

    김인후는 가파른 바위에 자리 잡은 대나무에서 위태로운 세월을 이기겠노라는 세자의 의지를 읽었다. 이렇게 풀었다. "뿌리 가지와 마디 잎사귀는 빈틈없이 촘촘하고, 돌을 벗 삼은 정갈한 뜻은 한 폭에 가득하네. 성인의 영혼이 조화와 짝하시니, 어김없이 천지랑 한 덩어리로 뭉치셨네."

    공부는 우주를 헤아리고 마음은 천지를 품으시라, 한 것이다. 세자는 교서관에서 갓 간행한 '주자대전(朱子大全)'까지 선사하였다. 물론 술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만큼 서로 깊었다.

    이해 7월 19일 홍문관 숙직 날, 부친의 편지를 받았다. 마침 생일이었다. 올겨울이면 부친은 고희가 되시는데 어떡하나, 울컥하였다. "오늘따라 힘들게 키워주신 부모님 그리워, 허둥지둥 펴보다가 눈물이 옷깃을 적셨네."

    인종대왕 묵죽도의 목판(왼쪽) 및 채색인본(彩色印本). 대나무는 단단하고 곧으며 비어있고 매듭이 있어 선비의 표상과 같았다. 그래서 많은 선비들이 대나무를 차군(此君) 즉 친구로 여겼다. 혹여 세자 또한 김인후와 대나무와 같은 묵계를 맺었을지 모른다. 훗날 나주에서 인종의 묵죽도를 목판에 새겼으며, 인종의 능침인 효릉(孝陵)의 재실에는 인본을 걸었다.
    이튿날 아침 경연에 나섰다. 병조판서 이기가 군기시·선공감 등의 노쇠한 장관을 유능한 인재로 교체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럴 듯하지만 산하기관을 확실히 장악할 요량이었다. 또한 지위와 등급을 본위로 하는 기강 확립을 내세웠다. 언론의 비판과 상하의 소통을 적대시하는 의도가 뻔하였다. 임금도 맞장구쳤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깔보는 일이 어찌 하루아침 일이겠는가!"

    이때 경연의 말석 김인후가 조광조·김식·김정·기준 등의 사면복권을 조심스레 사뢰었다. "근래 죽어도 죄가 남는 심정(沈貞)·이항(李沆) 같은 소인은 복직되었는데, 비록 일처리가 일시 잘못되었어도 본심은 나라를 속이지 않았던 이들은 성은을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숭상하였다고 '소학'과 '향약'까지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목소리가 너무 낮았다. 이틀 후 낮 경연에서 분명히 밝혔다. 이언적까지 역사에 부끄러움이 없어야한다며 가세하였지만 임금은 냉담하였다. "기묘인에게 마음 잘못은 없다할지언정 나라를 그르쳤다. 또한 그들은 '소학'과 '향약'을 겉치레로 여기고 내실에 힘쓰지 않아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깔보고 천한 자가 귀한 자를 업신여기는 폐단을 일으켰다."

    김인후는 홍문관 연명상소를 준비하였다. 먼저 동궁 화재는 인사가 어긋나서 하늘이 내린 견책이라고 정의하며, 국왕의 표리부동을 성토하였다. 아울러 사화의 진실과 치유를 거론하였다. 그러나 올라가지 않았다.

    이즈음 환해풍파(宦海風波)를 읊었다. "용의 얼굴을 보고 좋아하다가 비늘이라도 건드리면 어쩔 수 없어, 메마른 밭이라도 갈며 배곯지 않으면 되지 않겠나." 그리고 양친 봉양을 구실로 옥과현감으로 내려왔다. 1543년 12월이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