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브로커 공화국' 한국… 인맥 쌓으려 대학원 10곳 다닌다는데

조선일보
  • 강훈 기자
    입력 2012.08.18 03:04 | 수정 2012.08.19 09:43

    로비스트? 사기꾼?… 공천헌금 조기문 계기로 본 브로커의 세계

    남의 일을 도와주거나 성사시켜 주고 이득을 챙기는 사람을 '브로커'라고 한다. 일을 잘 처리하면 '실력자'란 말을 듣고, 돈만 챙겼다면 '사기꾼'이 되는 게 브로커다. 새누리당 공천헌금 의혹 사건의 조기문씨처럼 대형 사건에는 어김없이 브로커가 등장한다. 실력보다 인맥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더욱 기승을 부린다는 브로커, 그들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일러스트= 박상훈 기자
    ◇남의 돈으로 떵떵거리는 브로커

    40대 후반의 최모씨는 10년째 특별한 직업이 없다. 하지만 그는 서울 강남 최고급 룸살롱의 VIP 고객이다. 그가 팔아주는 술값이 한 달 평균 5000만원이 넘고 많을 땐 2억원에 육박할 때가 있다. 그의 술자리엔 늘 술값을 내는 전주(錢主)가 한 명 있다. 대부분 사업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최씨를 보고 선뜻 수백만 원의 술값을 지불하는 건 아니다. 최씨가 데리고 온 권력자들 때문이다.

    최씨의 능력은 '수첩'에서 나온다. 수첩엔 국회의원 30여 명과 청와대 비서진 20여 명, 고위 공무원과 경찰 간부 80여 명의 휴대전화 번호가 들어 있다. 그 중엔 친분이 두터운 인사도 있지만 한두 번 '스친' 사람도 많다.

    최씨는 사업가에게 자신의 인맥을 증명하기 위해 수첩에 적힌 정치인과 고위 공무원을 술자리에 동석시킨다. 이런 술자리에 한 번 참석한 사업가는 기꺼이 그날 술값은 물론 최씨에게 적지 않은 용돈을 건넨다.

    최씨의 '고객'은 주로 돈은 많지만 명예나 권력과는 거리가 있으며 훗날 지방자치단체장을 꿈꾸는 예비 정치인이 많다. 그들 중엔 최근 2년간 최씨의 술값과 용돈으로 5억원을 댄 사람도 있다. 최씨가 1년 전부터 몰고 다니는 BMW 승용차도 정치권 실세를 소개해주고 부동산 졸부(猝富)로부터 선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역시 정치 브로커로 분류되는 정모씨는 최근 여의도 국회 앞에 오피스텔을 얻었다. 5년마다 오는 큰 장(場)인 대선에서 한몫을 잡기 위해서다. 정씨는 대선후보의 참모나 정당 간부가 아니지만 정치권에선 나름대로 '마당발'로 통한다. 그는 낮에 주로 대선후보 캠프 관계자나 국회 보좌관을 만나 선거 판세나 실세 관련 동향을 귀동냥하고 밤엔 사업가를 만나 자신의 인맥과 정보력을 풀어놓는다. 정씨와 자주 어울리는 기업인 중엔 차기 정권에 줄을 대 사업 이득을 보려는 사람이 많다. 정씨는 이들에게 국회의원이나 캠프 관계자를 연결해주고 '관리비' 명목으로 한 번에 500만~5000만원을 받는다. 수년 전 건설사를 그만둔 그가 두꺼운 지갑을 유지하는 비결이 바로 이런 돈 때문이다. 정씨는 노무현 정권 때는 '친노 인맥'이라고 자신을 소개했고, 현 정권 초기에는 '친이 인사'라고 하더니, 요즘은 '친박 인맥'이라고 자랑하고 다닌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강화된 정치자금법 영향으로 수가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국회 주변 사무실의 절반은 브로커가 차지하고 있다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고 했다.

    ◇브로커 공화국인가

    정치 브로커들이 여의도에 많다면 검찰과 법원 청사가 있는 서초동은 법조 브로커의 주요 무대다. 서울중앙지검 인근 한 커피숍의 경우 손님 대부분이 브로커 아니면 사건 의뢰인이다. 30분만 앉아 있으면 "그 사건 무혐의 나오게 해주겠다" "그 판사 내가 잘 안다"는 말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다방에 앉아 수사나 재판 결과를 장담한 이들은 검사·판사가 아니라 브로커들이다. 사건 처리 과정에 '백과 연줄이 통한다'는 관념이 사라지지 않는 한 브로커는 영원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법조계는 브로커 문제로 홍역을 앓았다. '단군 이래 최대 브로커'라는 별명이 붙었던 윤상림씨와 카펫 사업을 하다 거물 브로커로 성장한 김홍수씨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많은 법조인이 그들과 친분을 맺은 사실이 드러난 적이 있다.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주목받는 직종이 금융 브로커다. 과거엔 은행 대출을 알선하는 대출 브로커가 대부분이었으나 요즘은 기업 인수·합병을 주선하고 거액의 커미션을 챙기는 M&A 브로커가 '각광'을 받고 있다. M&A 브로커들은 매매 금액의 10% 이상을 수수료로 챙기기도 하는데, 1000억원짜리 거래를 주선하고 단번에 100억원을 버는 브로커도 있다. 고졸·중졸 등 '학력 차별'이 없는 정치·법조 브로커와 달리 M&A 브로커들은 회계사나 펀드매니저, 변호사 등 고학력 전문직과 해외 유학파 출신이 많은 게 특징이다. 15년간 증권사 펀드매니저로 근무했던 한 금융 브로커는 "금융감독원 출신 등 각 분야 친구들과 서울 강남에 투자자문사를 만들어 기업 인수·합병 업무를 하고 있다"며 "성사만 되면 10억원 이상을 챙길 수 있는 프로젝트가 수두룩하다"고 했다. 경제 분야 브로커는 갈수록 업무 영역이 분화돼 '뷰티론'이라는 대출과 성형외과를 동시에 연결해주는 성형 브로커와 병원에 가짜 환자를 몰아 주고 양측에서 수수료를 떼어먹는 보험사기 브로커 등 신종 브로커들을 생산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엔 브로커 '청정구역'을 찾아보기가 드물 정도다. 대학생이나 직장인 상대로 취업을 알선하는 취업 브로커, 업체 하도급이나 납품을 중개해주는 건설·납품 브로커, 국방 분야의 무기중개 브로커, 신체 부위를 밀매하는 장기 브로커, 인허가 브로커 등 각 분야에 브로커들이 존재하고 있다. 외국에 나가도 한국행 비자 발급을 은밀하게 도와주고 돈을 챙기는 비자 브로커가 있고 북한에 인접한 중국 국경에는 탈북 브로커가 있다. '브로커 공화국'이라고 부를 만하다.

    ◇인맥 과시하고 친화력으로 무장

    새누리당 돈 공천 의혹 사건의 브로커로 지목된 조기문씨 / 허영한 기자

    분야는 달라도 브로커들에겐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고위층이나 유력층과의 친분을 과시한다는 점이다. 얼굴만 아는 정치인에 대해서도 '고객' 앞에선 자신의 '형님' '동생'이라고 말한다. 인맥을 자랑하기 위해 뚜렷한 이유 없이 유력 인사와 통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가끔은 엉뚱한 곳에 전화를 걸어 '○장관' '△의원' 하며 나 홀로 통화를 할 때도 있다. 고위층과 찍은 사진이 있다면 소지하고 다니다 기회가 되면 반드시 보여주는 것도 브로커의 고전 수법이다. 브로커들은 대부분 언변과 친화력이 뛰어나다. 많은 사람을 관리해야 하는 직업 특성상 술자리 한번 가지면 그날 밤 안에 '호형호제' 사이로 발전시키려고 하는 게 그들의 속성이다.

    그리고 브로커들은 반드시 대가를 요구한다. 경험 많은 브로커의 경우 '천사'처럼 계속 도와주는 듯하지만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이권이나 금전을 요구한다. 브로커는 '인맥기부자'나 '자원봉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브로커 세계 역시 경쟁이 치열해 살아남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한다. 인맥을 쌓기 위해 명문대 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 한두 개는 기본으로 다니며, 10여개 대학원 과정을 수료한 브로커도 있다. 지도층과 언제든지 동문 관계로 엮일 수 있는 '스펙'을 다져 놓는 것이다.

    브로커 중엔 특히 문상(問喪) 전문가가 많다. 법조 브로커 윤상림씨는 유력 인사가 상을 당하면 장례 절차를 주도할 정도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상가가 썰렁하면 정치인 등 유명 인사를 조문객으로 불러 모았다고 한다. 조의금 또한 평소 씀씀이보다 두둑하게 넣어 법조계 많은 인사가 윤씨에게 '감복'했다.

    전문 분야별로 뛰어난 정보력을 가진 브로커도 많다. 정치 브로커는 실세 정치인의 지연과 학연은 물론 최근 가정사까지 파악하고 있으며, 일부 법조 브로커는 검찰 주요 간부의 신상 정보를 달달 외울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국내에서 브로커 활동은 대부분 불법이다. 공공기관이나 금융 업무를 도와주고 금품을 받는다면 알선수재나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처벌을 받는다. 정치 브로커들도 공천이나 선거에 개입해 돈거래를 하면 정치자금법이나 선거법 위반 혐의가 적용된다.

    브로커 근절이 어렵다 보니 이들의 활동을 양성화하자는 취지에서 오래전부터 로비스트법이 추진되고 있지만 반대 의견이 여전히 많다.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은 16대 국회 때인 2001년 10월 외국 정부나 기관을 위해 국내에서 활동하는 로비스트의 등록을 의무화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으나 변호사 단체 등의 반발로 주목받지 못했다.

    대한변호사협회 관계자는 "미국이나 유럽처럼 전문성과 실력을 중시하는 사회에선 브로커 활동을 합법화할 수 있으나 인맥과 연줄이 잘 통하는 사회에선 브로커가 불평등을 조장하는 등 사회악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