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8월22일 김수환 추기경이 집도한 장준하 선생의 장례식.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 운동을 하다 1975년 의문사한 고(故) 장준하 선생에 대한 검시가 37년 만에 이뤄진 결과, 머리뼈에 금이 가 있는 것과 머리 뒤쪽에 6cm 정도 크기의 구멍이 발견됐다고 한겨레신문이 15일 보도했다.

고인의 유족과 장준하 추모공원 추진위원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나사렛 천주교 공동묘지에 안장된 고인의 유골을 1일 파주시 탄현면 통일동산에 조성 중인 ‘장준하 공원’으로 이장했다. 이 과정에서 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실 교수가 참여한 가운데 유골에 대한 검시가 이뤄졌다.

장 선생의 아들 장호권(63)씨는 “과거 검시를 검토했으나 (아버지를) 두 번 죽인다는 반대 여론에 못하다가 이번에 묘를 이장하면서 자연스럽게 검시가 이뤄졌다”며 “검시 결과 오른쪽 귀 뒷부분 후두부에 망치 같은 것으로 맞아 동그랗게 함몰된 흔적이 발견됐다”고 말했다고 한겨레신문은 전했다.

그는 “실족 등 자연적인 사고로는 발생할 수 없는 인위적으로 만든 상처인 것으로 검시한 의사가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고인은 1944년 일본군에 징집됐다가 탈출해 2400km를 걸어가 김구 선생이 이끄는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입대했다.

이승만 정부 시절 월간지 ‘사상계’를 창간해 이승만 정부와 맞섰고, 박정희 정부의 월남파병, 한일국교 정상화 등에 반대하다 1967년 수감 상태에서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74년 유신 체제에서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고인은 1975년 8월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당시 경찰은 장 선생이 약사봉에 올랐다가 높이 14미터의 벼랑에서 실족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경사 75도의 암반에서 체중 73kg인 고인이 실족해 추락했다면 당연히 있어야 할 외상이 없고 심지어 옷, 보온병 등이 훼손되지 않았다는 점 등이 확인되면서 단순한 등산 실족사가 아니라 ‘국가권력에 의한 정치적 암살’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