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5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리는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후보전(展)'에는 회화와 조각이 없다. 타들어가는 모기향(구동희), 빈 공간을 가린 가림막(이미경), 쇼핑몰 설명서와 청소기(잭슨홍) 등이 전시 작품이다.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9월 16일까지 열리는 '아트스펙트럼' 전시에도,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서 31일 개막하는 '올해의 작가' 후보전에 출품하는 전준호·문경원, 임민욱, 이수경, 김홍석의 전시에도 모두 영상·설치·퍼포먼스뿐이다.

최근 미술관에서 회화와 조각이 사라졌다. 대신 설치·영상, 퍼포먼스 같은 개념미술과 실험적인 작품들의 공습이 거세다. 관람객에게 '사유(思惟)'를 요구하는 작품들이다.

불경기엔 설치·영상이 뜬다

전문가들은 경기불황이 '회화·조각 실종사태'의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서진수 미술시장연구소장(강남대 교수)은 "작가들이 시장이 좋을 때는 팔리는 작품을 재생산하고 되풀이하기 바쁘지만, 지금처럼 불경기엔 '장르의 확장'을 고민하며, 자신의 역량을 보여주는 데 전념하게 된다"고 했다. 호황기였던 2006~2007년 무렵엔 시장에 회화가 쏟아지고, 국내에선 극사실주의 회화가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시장이 위축되자 작가들은 팔리지는 않더라도 아이디어와 기량을 펼쳐보일 수 있는 실험적인 영상·설치에 도전하게 됐다는 것. 설치 작품 전시를 자주 해 온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는 "불경기였던 1990년대엔 빌 비올라, 로버트 고버 등의 영상 작품이 인기였다. '비엔날레의 시대'였던 당시엔 권력을 쥔 큐레이터들이 공간을 과감하게 쓰고 실험적인 표현을 하는 작가를 선호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호황 덕에 '컬렉터의 시대'가 오면서 소장하기 쉬운 페인팅 일색으로 갔다. 그러다 최근 몇년 새 경기가 나빠지면서 다시 설치·영상의 시대가 온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미술 시장 호황기였던 2007년 4.32%였던 국내 설치·영상 전시 비율(한국문화예술위원회 조사·개인전 기준)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2010년 5.54%, 2011년 8.35%로 증가했다.

에르메스상 후보작가 전시에 설치된 이미경의‘가림막’. 관객은 가림막 뒤에‘작품’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만 실제론 아무것도 없다.

회화·조각 실종은 세계적 현상

설치·영상·퍼포먼스의 전시장 점령은 세계적인 흐름이다. 런던·파리· 카셀에서도 '미술=시각예술'이란 고정관념은 무너지고 있다. 런던의 대표적인 기획전 전문 전시장 헤이워드 갤러리는 6월 12일~8월 5일 'Invisible(보이지 않는)' 전을 열었다. 앤디 워홀이 올라갔다 내려와 작가의 '아우라'만 뿜어놓고 '보이지 않는 조각'이라고 명명한 텅 빈 좌대, 보이지 않는 잉크로 그린 이탈리아 작가 지안니 모티의 드로잉 등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전시했다. 파리 퐁피두센터는 금융 위기 직후인 2009년 '빈 공간'과 비물질에 집중한 전시 'Vides(텅 빈 것들)'를 열었고, 올여름 독일 카셀 도큐멘타 메인 전시장을 차지한 것도 열린 문을 통해 불어들어오는 바람을 작품으로 제시한 영국 설치미술가 라이언 간더(36)의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의미가 필요해: 보이지 않는 끌어당김'이다.

(사진 왼쪽)삼성미술관 리움의 젊은 작가 전시‘아트 스펙트럼’전. 전시장은 온통 설치 영상 사진 일색으로 회화, 조각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진 오른쪽)빈 좌대 하나만 덜렁 놓인 톰 프리드먼 의‘무제(저주)’.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의‘Invisible’전에 나왔다.

예산 삭감된 미술관들의 자구책

설치·영상·퍼포먼스의 대두는 비용 문제와도 맞물려 있다. 영국 현대미술 전문가인 임근혜('창조의 제국' 저자)씨는 "블록버스터 회화·조각 전시를 하려면 운송·설치·보험료가 굉장히 비싸다. 그렇지만 문서나 영상 위주의 개념미술 전시, '몸으로 때우는' 퍼포먼스 전시는 비용이 훨씬 적게 든다"고 했다. 경제 위기 이후 공공 예산이 삭감되면서 재정 어려움을 겪는 미술관들의 자구책이라는 것. 임씨는 또 "'물량 공세'식 블록버스터 전시에 질린 사람들이 비상업적인 설치미술 전시를 신선하게 받아들이고, 개념미술 전성기였던 1960년대의 향수(鄕愁)를 느끼면서 '비물질' 전시가 하나의 트렌드로 굳어지는 추세"라고 했다.

중국 설치작가 가오레이(32), 영상작가 청란(31) 개인전을 연 아라리오갤러리 곽준영 큐레이터는 "중국에서도 쩡판즈 등 아방가르드 회화 작가의 거품이 빠지면서 쑹둥·황용핑 등 설치·영상 작가들이 주목받고 있다"고 했다.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는 "상업 갤러리 입장에서도 불경기 땐 어차피 작품이 안 팔리니까 설치·영상 작가에게 자리를 내주고, 그들이 성장해 시장이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미래를 대비하는 전략"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