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돕던 '조지 쇼' 49년 만에 훈장 받다

조선일보
  • 전현석 기자
    입력 2012.08.11 03:12

    일제 때 단둥에 무역회사, 건물에 임시정부 교통국
    백범 김구·의친왕 망명 도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작년에야 손녀·증손녀 찾아

    조지 쇼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독립운동의 중추 역할을 한 공로로 아일랜드계 영국인인 조지 L. 쇼(Shaw)에게 수여된 훈장이 49년 만에 그의 유족에게 전달된다.

    국가보훈처는 10일 "쇼의 유족인 손녀 마조리 허칭스(65·Hutchings)와 증손녀 레이첼 사씨(43·Sassi)를 초청해 16일 서울 63빌딩에서 쇼의 건국훈장 독립장 전달식을 갖는다"고 밝혔다.

    쇼는 1880년 아일랜드계 아버지와 중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중국에서 활동하다 20대 초반 우리나라 평안도 지역의 금광 회사에서 일했으며, 이후 중국 단둥지역에서 무역·선박업을 하며 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했다.

    동국대 한철호 교수(역사교육학과)는 "쇼가 독립운동에 나선 이유는 그의 고향이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은 아일랜드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며 "일제의 폭압을 직접 목격한 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했다. 독립운동가 김산의 일대기를 다룬 책 '아리랑(Song of Ariran)'에서 김산은 "그(쇼)는 일본인을 거의 영국인만큼이나 싫어했다. 그래서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 독립운동을 열렬히 지원해 주었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임시정부와 국내외 업무 연락을 위한 비밀연락망 조직인 연통제(聯通制)를 운영했다. 쇼는 이를 돕기 위해 단둥에 있는 자신의 무역선박회사 이륭양행(怡隆洋行) 2층에 임시정부 교통국 사무소를 설치했다. 그의 회사와 배는 치외법권 지역에 속했고, 일본 경찰의 권한이 미치지 않아 임시정부가 애용했다고 한다.

    쇼는 이륭양행의 무역선을 통해 독립운동에 필요한 무기·군자금 전달, 독립운동가의 출입국을 도왔다. 백범 김구 선생도 3·1 운동 직후 단둥에 도착해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상하이로 망명했다. 1919년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義親王)의 망명 시도도 이 회사를 통해 이뤄졌다.

    쇼는 1920년 7월 신의주에서 내란죄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가 1920년 11월 보석으로 풀려난 뒤 상하이를 방문하자, 임시정부는 대규모 대중집회를 열어 환영했다고 한다.

    쇼는 일제 탄압이 계속되자 1937년 단둥에 있던 이륭양행을 매각해 푸저우(福州)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륭양행이 사라진 후 임시정부 연락망이 큰 타격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 외무성의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일제는 1932년 6월 쇼의 배인 신우호를 압류하는 등 그의 사업을 와해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군부까지 동원해 쇼의 배에 화물을 싣는 것을 방해했다고 한다. 그는 1943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무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정부는 쇼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지만 유족을 찾지 못해 이를 전달할 수 없었다. 국가보훈처는 작년 4월 쇼의 장남 사무엘의 딸 허칭스가 호주에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쇼의 손녀 허칭스와 증손녀 사씨는 11일부터 17일까지 국외거주 독립유공자 후손 자격으로 방한한다. 허칭스는 "할아버지가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왔었는지 전혀 몰랐다"며 "훈장은 우리 가족의 명예로 대(代)를 이어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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