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13일은 월요일이었다. 모간스탠리는 금융위기 쇼크로 하루하루 급전으로 부도를 막는 형편이었다. 그날 아침 7시, 수표 한 장을 들고 온 사람은 미쓰비시도쿄UFJ은행의 뉴욕 사무소 기획부장이었다. 수표에는 '90억달러―모간스탠리에 지불할 것'이라고 인쇄돼 있었다. 모간스탠리는 이 수표 한 장으로 살아났다.
한국에는 90억달러짜리 수표를 발행할 수 있는 은행은 한 군데도 없다. 대형 은행이 갖고 있는 외화는 기껏해야 여기저기 뿔뿔이 묻어놓은 20억달러 안팎이다. 달러가 조금만 없어도 절절매는 게 우리 은행들이다.
은행들이 이토록 허약하건만 정부는 무너진 저축은행을 하나둘 금융지주회사들에 억지로 떠넘기더니 망해가는 건설회사들에게 구제금융을 제공하라는 압박을 가하고 있다. 아파트 거래에 바람을 넣겠다며 주택 대출(DTI)을 헐렁하게 하라는 주문도 나왔다. 경기가 하강하면서 배출되는 부실 쓰레기를 은행에 넘기고, 경기 회복을 위한 돈 풀기도 은행들이 도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은행들은 언짢은 기색이 역력하다. 몇 달 전만 해도 부실 더미를 처리하는 데 별 부담을 느끼지 않더니 지금은 확 달라졌다. 그동안 잔 펀치를 맞던 신체 부위(部位)가 이제는 큰 주먹을 감당해야 할 시점이다. 싸늘한 저성장(低成長) 바람이 중견 그룹의 몰락과 한계 중소기업의 줄도산을 예고하고 있다. 머지않아 금융회사 중에는 피멍이 들다 못해 팔다리를 잘라내야 가까스로 생명을 건질 수 있는 곳이 등장할 조짐이다. 벌써 점포를 줄이고 사원을 내보내는 회사가 등장했다. 은행은 인심 잃는 마케팅을 멈추지 않고 정부는 그 위에 부실 덤터기를 몇 곱 끼얹는 게 요즘 금융가의 풍경이다.
이러다 은행들이 무너지면 두 차례 외환위기 때처럼 재정 지원을 통해 구제할 길은 있다. 재정이 최후의 생명줄 역할을 할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게 공무원들의 전형적인 설명이다. 정부는 '뒤에 정부가 버티고 있다'며 은행들에 불황이 토해낸 온갖 오염물질을 청소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과연 정부를 믿어도 되는가' '정치가 나라 경제를 살려낼 능력이 있는가'라는 불신(不信)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장기 침체에서 정부의 실패, 권력자의 무능이 우리들 눈앞에서 발가벗고 말았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4년 전 은행 도산을 막으려고 정부가 나서서 은행을 구제했다. 중앙은행이 대기업을 구출하는 비상수단도 동원했다. 한동안은 그게 먹혀드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은행들이 다시 헉헉대며 비틀거리는 꼴을 보면서도 정부는 더 이상 구조선(救助船)을 보낼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금융도 추락했고, 정부도 추락했고, 정치도 추락했다. 은행가나 공무원이나 정치인이나 온통 체통을 구겼다.
국민들이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정권을 바꾼 유럽 국가가 19곳이 넘지만 새로운 권력자인들 신통한 해법이 있을 턱이 없다. 오바마 정권, 영국 캐머런 정권, 프랑스 올랑드 정권 모두가 뾰족한 출구를 찾지 못해 허우적거리고 있다. 금융과 재정이 동시에 빚더미에 빠져 있으면 어느 나라 경제든 검붉은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다.
우리 경제가 다시 2%대(臺) 저성장에 빠졌다. 코앞에 닥친 위기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경제를 지탱할 마지막 방파제를 마련해둘 때를 맞았다. 이번 위기에선 금융과 재정 부문 중 어느 것을 먼저 희생시키고 어느 쪽을 마지막 보루로 지켜야 할지 생각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처럼 정부가 금융회사들에 불경기의 뒤청소를 맡기려면 정부는 어떤 정치 상황에서도 재정만큼은 튼튼하게 지켜내야 한다. 무상복지와 신공항 같은 지역 사업으로 재정 쪽에서 빚더미가 늘어갈 수밖에 없다면 당장 금융 부문을 건실하게 만드는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기존 정치권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져 국민은 새 정치를 갈망하고 있다. 금리조작 같은 장난질을 일삼는 은행도 인심을 잃어 가고 있다. 두 차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정부가 마지막 버팀대가 돼줄 수 있을까' 하며 공무원 집단의 위기 수습 능력에 대한 기대마저 차갑게 식었다. 국민이 정치를 못믿고 정부와 은행을 믿지 못할 때 우리 경제가 위기를 맞으면 곧장 유럽을 닮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