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 기간은 가족용 극장 애니메이션의 최대 성수기이다. 그러나 올여름 극장가에선 이 분야의 한국 애니메이션을 찾아보기 힘들다. '마다가스카3' '아이스에이지4' '새미 어드밴처2' '도라에몽 극장판' '명탐정 코난' 등 외국 작품만 즐비하다. 지난해 200만명 넘는 관객을 동원한 '마당을 나온 암탉' 외엔 최근 몇 년간 상업적으로 성공한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를 꼽기 힘들다. 왜 이렇게 한국 극장용 애니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까.
"애니메이션을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만들고 싶다면 프리프로덕션(pre-production·작화 전 캐릭터와 스토리를 만드는 단계)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특히 자본과 인력이 부족한 한국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세계 최고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꼽히는 미국 '픽사'사의 테크니컬 디렉터 이민형(39)씨가 내놓은 해답은 이랬다. 이씨는 최근 끝난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픽사의 신작 '메리다와 마법의 숲'(9월 개봉)을 소개하기 위해 방한했다.
22일 서울 중구 한 카페에서 만난 이씨는 "한국에서는 (돈·시간 등) 물리적인 압박 때문에 프리프로덕션을 길게 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래도 프로덕션(작화 등 본 작업)보다 돈이 적게 들어가는 과정이니 여기에 주력하는 게 효율적일 것"이라고 했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그는 시카고 예술학교(SAIC)에서 아트 테크놀로지를 전공한 뒤 뉴욕 자연사박물관과 드림웍스를 거쳐 2008년부터 픽사에서 일하고 있다.
픽사의 대표작은 '토이 스토리' '인크레더블' '업' 등으로, 드림웍스나 블루스카이 등 다른 유명 애니 제작사 작품들보다 유독 성인 관객에게 인기가 많다. 이씨는 그 비결에 대해 "가족을 위한 작품이라도 스토리의 무게를 잃지 않고 철학적 깊이를 담으려고 한다.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 아니다"라고 했다. "중요한 건 결국 캐릭터와 스토리죠.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경우에도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데는 1년 반이 걸렸지만 스토리와 캐릭터를 만드는 프리프로덕션 단계엔 5년을 공들였어요.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놀랄 정도로 정교하고 까다롭게 일을 합니다."
이씨는 "픽사도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독특한 스토리를 만드는 데 종종 한계에 부딪힌다. 그럴 때 단편 작품을 활용하는 것이 좋은 돌파구가 되고 있다"고 했다. "이 회사에선 누구나 단편을 만들 수 있고, 그 아이디어가 좋으면 당장에라도 채택이 됩니다. 한국의 아티스트들에게도 단편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고 이걸 발전시킬 수 있도록 산업과 연계를 하거나 기존 시나리오 작가들과 아티스트들이 함께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게 좋을 듯해요."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최대 숙제로 지적되는 '원 소스 멀티 유즈(하나의 콘텐츠를 다양한 방식으로 판매해 부가가치를 극대화하는 방식)'는 픽사에서도 중요시하는 부분. 이씨는 "요즘 영화의 성공 유무는 '원 소스 멀티 유즈'로 많이 판단한다. '카2(Car2)'의 경우에도 장난감 매출이 영화 매출보다 훨씬 높다"고 했다. "'니모'하면 누구나 그 물고기 캐릭터를 떠올리듯이 고유의 브랜드가 될 만한 캐릭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어하는 한국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충고가 있느냐"고 하자 그는 "인문학적 소양을 많이 키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자신의 전문 분야 실력을 쌓으면서 동시에 그림, 음악, 문학, 철학 등 예술과 인문학에도 꾸준하게 관심을 가져야 해요. 그래야 단순한 일을 하더라도 기계적으로 사고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접근 방식을 생각해낼 수 있거든요. 공대 출신 기술 담당 임원들도 예술과 인문학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는 게 바로 픽사의 큰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