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재계에는 지난달 하순 인천공항에서 신제품 발표회를 연 박세창 금호타이어 부사장(37) 얘기가 화제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장남인 그가 원고도 없이 항공기 격납고 안에 단상을 마련해 놓고 이어(ear)마이크를 낀 채 직접 제품 설명 프레젠테이션을 한 데 대해 "신선한 충격이다" "회사를 키우려는 열정과 진정성이 느껴졌다"는 반응이 많다. 일각에선 '의도된 연출'이라는 혹평도 나오지만 "오너나 최고경영자(CEO)가 직접 나와 신제품 성능을 설명하는 애플이나 마이크로소프트(MS)의 신제품 발표회를 보는 듯했다"는 찬사도 많다.
크라운·해태제과 윤영달 회장의 차남인 윤성민 상무(38)도 비슷하다. 윤 상무는 3년 동안 서울 안국동 점장(店長)으로 일하며 사실상 특별훈련을 받았다. 그는 현장에서 체험한 애환(哀歡)과 아이디어를 본사 영업 담당 임원으로 발휘해 '발로 뛰는 영업맨'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만 35세이던 2005년에 기아차 사장을 맡아 '디자인 기아'를 총지휘하며 기아차의 글로벌 경쟁력을 크게 높인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도 "은수저 물고 태어난 3세 같지 않게 진지하고 겸손하다"는 게 중평이다.
하지만 우리 재계 전체로 시야를 넓혀 보면 상당수 대기업의 총수(오너) 자녀는 특출한 성과가 없는데도 '벼락출세' 코스를 여전히 질주한다. 한 조사에 따르면 오너 자녀는 입사 후 평균 3.8년 만인 31.8세에 임원급으로 선임된다. 이들은 또 평균 2.2년 만에 더 높은 직급의 임원으로 승진한다. 빨라야 40대 중·후반에 '별 중의 별'이라는 대기업 임원이 되고 다시 4~5년 후에야 승진 사다리에 겨우 오르는 일반 직장인과는 완전히 딴 세상, 딴 리그에 살고 있는 셈이다.
모기업으로부터 알짜 사업을 헐값 또는 편법으로 넘겨받거나 밀어주기 거래로 땅 짚고 헤엄치듯 폭리를 취하는 대기업 자녀도 여전하다. 부동산 경기 침체가 전국적으로 극심한 와중에도 유독 땅값이 오르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과 신사동 일대가 이를 상징한다. 삼성·신세계·롯데 등 재벌가 2~3세들이 패션·명품의 중심지라는 프리미엄을 노려 이곳 부동산을 대거 사들이는 바람에 2009년 말까지 3.3㎡(1평)당 평균 1억원이던 이 일대 요지의 땅값은 올 들어 2억원까지 치솟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 정치권에서는 경제 민주화와 재벌 개혁 주장이 날로 거세지고 있다. 앞으로 당분간 이런 반(反)대기업 정서가 수그러들 기미는 없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보다 더 긴장하고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당사자는 재벌가(家) 구성원들일 것이다. 도요타·듀폰·발렌베리 같은 글로벌 선진 기업은 예외 없이 '창업자의 직계라고 해도 특별 대우는 없다'는 제왕학(帝王學)의 원칙을 금과옥조처럼 지키며 실천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달라진 눈높이에 맞추려면 오너 3~4세들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겠다'는 안이한 발상을 떨치고 제2·제3의 이병철·정주영 회장이 되어 현장력(力)과 치열한 도전 정신으로 분발해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 존재 이유와 가치를 증명해야 기업은 물론 오너 경영 시스템도 살 수 있다.
입력 2012.07.12. 23:30업데이트 2012.07.13.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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