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 국제부 차장

전두환 정권 말기에 들어간 대학 캠퍼스는 민주화 열기로 뜨거웠다. "국민이 뽑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현실을 고쳐야 한다"는 선배들의 말에 이끌려 그 열풍에 뛰어들었다. 박종철과 이한열이 목숨을 잃는 것을 보며 분노했고,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아 정권을 바꾸고 민주화를 쟁취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몸이 뜨거웠다.

그러던 어느날 대학 도서관 벽에 붙은 대자보를 읽으며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민주화 과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대자보는 담배 피운 여학생을 폭행한 남학생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사건은 운동권 학생들이 주로 드나드는 학생회관의 휴게실에서 일어났다. 늘 담배연기가 자욱한 곳이었는데, 한 여학생이 담배를 피워 물자 남학생이 다가가 "여자가 무슨 담배질이냐"며 따귀를 때렸다. 대자보를 쓴 여학생은 정치적 민주화를 지향한다는 운동권 남학생들이 성(性)평등이란 또 다른 민주적 가치에는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가부장적인 기득권을 당연시한다고 비판했다. 그 글을 읽으며 당시 한국 남자 대학생들이 지향하는 민주화가 여성과 노예를 배제했던 고대 그리스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이집트 민주화의 성지인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서 연이어 발생한 성폭력 사건 소식을 접하며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60년 군부 독재를 끝내고 당선된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이 광장에서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여 상징적인 취임식을 치렀다. 법적인 취임식은 하루 뒤에 헌법재판소 앞에서 예정돼 있었지만 무르시는 이곳을 이집트 민주화 시대를 여는 진정한 의미의 취임식장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집트 여성의 눈에도 타흐리르 광장이 그런 의미로 보일까 싶다. 이집트 여성들에게 그곳은 마초(macho·남성 우월주의자)가 득실대는 위험하고 치욕스러운 범죄의 광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8일 이 광장에서 성추행 방지 캠페인을 벌이던 50여명의 여성이 남성들로부터 공격당했다. 여성 시위대가 '성희롱은 야만적인 것'이라고 쓴 피켓을 들고 광장에 들어서자 남자 수백명이 그들을 둘러싸고 야유를 퍼부었다. 일부는 광장 구석으로 여성을 끌고가 몸을 더듬었다. 민주화 시위가 뜨겁게 타오르던 지난해 2월에는 이 광장에서 미국의 여성 취재기자가 남자 시위대에 둘러싸여 윗옷이 벗겨지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성추행을 당하는 봉변을 겪었다. 무르시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기 위해 지난달 27일 광장으로 나온 남자들 중 일부는 현장에 취재 나온 영국인 여성 PD를 붙잡아 옷을 벗기고 성폭행했다. 군부에 의지해 철권을 휘두른 무바라크나 완력으로 여성을 괴롭히는 시위대 남성들이나 본질적인 차이는 없어 보인다.

유엔이 발표한 2010년 세계 성평등 지수에서 이집트는 150여개 국가 가운데 108위에 불과하다. 미국 잡지 포린폴리시는 지난해 '아랍의 봄'의 미래에 대해 "남성들끼리의 권력교체는 이뤄질지 몰라도 여성 인권 증진이라는 민주화는 완성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었다. 이런 우려를 불식하지 못한다면 지난해 타흐리르 광장에서 시작된 이집트 민주화의 역사적 의미는 크게 퇴색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