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살이 (고래)등에 꽉 꽂히면 네가닥 갈퀴가 우산처럼 쫙 펴져. 그러면 제아무리 몸부림쳐도 소용없어. 당최 빠지질 않으니까…."
일흔이 넘은 포경선(捕鯨船)의 마지막 포수(砲手) 김용필(72)씨는 고래 얘기를 꺼내자 지칠 줄 모르고 말을 이어갔다. "작살 밧줄만 놓치지 않으면 잡는 거지. 길어도 30분이면 지쳐서 항복해…. 한창때는 포를 쏘면 열에 아홉은 어김없이 명중이었어…."
김씨는 국내 하나뿐인 고래탐사선을 타고 고래를 찾으러 다니는 유일한 전직 포수다.
김씨가 포경선을 처음 탄 건 1950년대 말이었다. 국내 최대 포경 전진기지인 울산 장생포 부근에서 태어난 그는 자연스럽게 '포경선 포수'를 꿈으로 삼았고, 17~18세 때부터 고랫배를 탔다. 당시 청년들 사이엔 "고랫배 포수 할래? 울산군수 할래?"라고 물으면 "고랫배 포수 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당시 참고래 한마리가 쌀 300가마 값어치가 나갔으니 큰돈 만지려고 포경선으로 많이들 몰려들었다"고 했다.
1970년대 들어 고래고기가 일본으로 수출되면서는 '장생포 개도 만원짜리 물고 다닌다'는 말이 돌 만큼 경기가 좋았다. 당시 솜씨 좋은 포수는 포경선 선주들이 서로 데려가려고 난리였고, 한 달 월급이 100만원 넘는 포수도 상당수였다.
김씨는 조그만 목선에서 화장(조리사)과 세라(갑판원)를 거쳐 1970년대 초 꿈꾸던 포수가 됐다. 고랫배 탄 지 15년 남짓 만이었다. 그는 "고래는 눈으로 잡는데, 내가 제법 눈이 좋아 다른 포수들이 귀여워했다"고 했다. "고래가 있는 바다는 미세한 떨림이 있는데 그걸 잘 읽었다"고 했다.
그는 한해 평균 수십마리씩 고래를 잡았다. 밍크는 3~7월, 참고래는 8~10월, 귀신고래는 11~12월이 철이었다. "유명한 '장포수' 밑에서 포수 일을 배울 때 겨울 한철에 귀신고래 다섯마리를 잡기도 했고, 76자짜리(25m가량) 나가수(참고래)도 잡아봤다"고 했다. 당시 장생포항에는 김씨를 포함, 수십명의 포수들이 포경선 50여척으로 바다를 누볐다.
포수로서 최고의 솜씨를 뽐낼 때쯤인 1985년 상업포경금지 조치로 속절없이 일손을 놓았다. 마흔다섯 때다. 이후 포수와 선원들은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김씨도 장생포 바닷가에서 조그만 횟집을 차리고 작은 낚싯배로 고기를 잡아올려 생계를 이었다. 다행히 두 아들은 건축사로, 중견기업 직장인으로 반듯하게 성장했다.
2000년대 들어 국내 연안 고래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그는 10여년간 고래연구소 도우미로 일했다. 연구소 고래조사선을 타고 보름에서 한 달씩 동해에서 서해까지 연안을 따라 고래목시(目視·눈으로 찾기) 조사에 참여했다. 올해부터는 울산 남구가 국내 처음이자 유일하게 운영중인 고래탐사선 '고래바다여행선'에 탑승해 관광객들에게 고래를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두 번 고래를 찾아 바다로 나선다고 한다.
한편 정부가 최근 국제포경위원회(IWC)에서 우리 연안의 과학적 조사목적 포경 재개 방침을 밝힌 데 대해 옛 고래잡이 본거지였던 울산 장생포에서는 이를 환영하는 어민들과 반대하는 환경단체들이 맞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