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의 한식당에 신랑·신부·양가 혼주 등 여섯 명이 모였다. 상견례 자리였다.

신부 어머니는 내심 "저쪽은 막내아들이지만 우리 집은 맏딸이고 개혼(開婚)이니까, 사돈이 예단을 번듯하게 해오라고 하시면 최대한 해 드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래서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신랑 어머니에게 "혼수나 예단은 어느 정도로 해 드리면 실례가 되지 않겠느냐"고 솔직하게 물어봤다. 신랑 어머니는 단호하게 "다 필요 없다"고 했다. "그냥 다 생략합시다. 한복도 각자 사 입고 결혼식장에서 봅시다."

이듬해(2006년) 1월, 신랑·신부는 정말로 아무것도 주고받지 않고 결혼식을 올렸다. 젊은 부부는 두 사람 저축으로 8000만원짜리 전셋집을 마련하고, 친정어머니가 쓰던 그릇을 물려받았다.

빌트인 가구가 많은 집이라, 새로 산 물건이라곤 100만원짜리 TV 한 대, 500만원짜리 침대가 전부였다. 2006년 1월 결혼한 곽종호(42·회사원)·박주희(34·시민단체 근무)씨 부부 이야기다.

신랑 어머니의 실천에서 시작된 릴레이

신부 어머니 손추자(61)씨는 "솔직히 결혼 준비하면서 내내 '예의로 사양하시는 것 아닐까' 조마조마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랑 어머니 현정자(72)씨는 진심이었다. 현씨에게는 남들 다 받는 예단을 '나만은 받지 말자'고 굳게 결심할 만한 사연이 있었다.

"20년 전 하나뿐인 딸을 시집보낼 때 예단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어요. 딸이 울기도 참 많이 울었어요. 이불부터 가구, 반지, 음식까지 다 해줘야 했어요. 12평짜리 전셋집에 집어넣을 7자 장롱을 맞추면서 '이게 그 집에 왜 필요한가. 이런 풍습은 다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본전' 생각하면 영영 이렇게 악순환이 반복될 테니, 나부터 며느리 볼 때 악습을 끊자고 별렀지요."

아들 가진 어머니가 “예단 안 받겠다”고 했다. 딸 가진 어머니가 고맙게 여기다가, 나중에 자기 아들 장가보낼 때 자기도 예단을 사양했다. 8일 서울 광화문에서 신랑 어머니 현정자(왼쪽)씨와 신부 어머니 손추자씨가 손녀 민지양을 가운데 두고 활짝 웃고 있다.

신부 어머니 손씨는 "너무나 뜻밖이라 몇 번이나 '정말이시냐'고 뜻을 확인했다"면서 "사돈의 진심을 느낀 뒤, 마음속으로 '좋은 사돈 만나 복(福) 받았으니, 나도 이 복을 남에게 베풀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그 결심을 실천할 기회가 1년 만에 찾아왔다. 곽씨 부부가 결혼한 지 1년 뒤에, 이번에는 신부의 오빠가 결혼할 여자를 데려온 것이다. 손씨는 예비 사돈을 향해 "딸 시집 보낼 때 아무것도 안 보낸 사람이 아들 장가간다고 예단을 받으면 되겠느냐"면서 "예단 보내지 마시라"고 했다.

"무조건 남들 따라 하면 결혼문화 못 바꿔"

8일 서울에서 만난 두 어머니는 "모두가 '남들도 다 이렇게 한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결혼문화가 결코 바뀌지 않는다"고 했다.

신랑 어머니 현씨는 "내가 일제 강점기, 6·25전쟁, IMF 외환위기까지 인생의 위기만 세 번을 겪었는데, 전쟁통에 세간이 불타는 것을 보고 일찌감치 마음을 비우고 사는 법을 배웠다"면서 "막내아들 장가보내기에 앞서 큰아들 결혼시킬 때도(1996년) 며느리가 '밍크코트 해준다'고 하기에 '삼한사온 날씨에 밍크코트가 왜 필요하냐'고 말렸다"고 했다.

"그리고 저만 '안 하겠다'고 마음먹어서 된 일도 아닙니다. 며느리도 '보석은 별로 안 좋아한다'며 예물 욕심 안 냈고, 아들도 '집 한 채 해달라'고 손 벌리지 않았습니다. 사돈도 검소한 걸 좋아하셔서 서로 주고받는 것이 없는 예단 없는 결혼식이 된 것이지요."

신부 어머니 손씨는 "남들은 사돈끼리 상견례 때 한 번, 결혼식 때 한 번, 애 낳을 때 한 번 만나고 평소엔 남남처럼 산다고 하지만, 나는 무공해 산나물 같은 귀한 음식이 생기면 맨 먼저 사돈이 생각나 얼른 선물로 보낸다"면서 "명절 때도 자식들 통하지 않고 우리끼리 안부 전화를 주고받는다"고 했다.

두 어머니를 모시고 온 신랑·신부는 "주위 친구들 결혼하는 걸 보면서 양가 어머니가 새삼 훌륭하게 느껴져 존경스러울 때가 많다"고 했다.

신랑 곽씨는 "어머니가 예단만 안 받으신 게 아니라, 우리에겐 아무 말 없이 본인 돈으로 친척들에게 20만원씩 보내며 '며느리 잘 봐달라'고 하셨다는 걸 뒤늦게 알고 감동했다"고 했다.

신부 박씨는 "나보다 늦게 결혼하는 친구들이 '예단을 어떻게 했느냐'고 물을 때 '아무것도 안 보내고 집값은 양가가 분담했다'고 하면 다들 놀라며 부러워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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