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강훈의 와일드 터치] 法대로 35년… 전쟁이었다

조선일보
  • 강훈
    입력 2012.07.07 03:14 | 수정 2012.07.08 16:01

    스타 검사에서 대법관까지… 10일 퇴임하는 안대희

    안대희(安大熙·57)만큼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법조인은 드물다. 8년 전 대선 자금을 파헤치던 그에게는 ‘국민 검사’ ‘안짱’ ‘잘 드는 칼’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팬클럽이 생겼다.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였기에 그의 존재감은 더욱 커 보였다.

    대선 자금 수사를 성공리에 마친 안대희는 2006년 서울고검장에서 대법관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6년이 흘렀고, 사흘 뒤인 10일 퇴임식을 갖는다. 35년 공직생활을 마감하는 자리다.

    안대희의 학력과 관력도 화려하다. 경기고·서울대 법대를 나온 그는 만 20세에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스물다섯에 검사가 됐다. 한 번 하기도 어렵다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본부 과장을 두 번 했고 요직이라는 서울중앙지검 특수1·2·3부장을 모조리 거쳤다. 그런 안대희도 검사장 승진에서 두 차례 탈락하는 ‘아픔’이 있었다.

    작년 초 법원과 검찰이 대립할 무렵 ‘현직 대법관’을 이유로 인터뷰를 사양했던 그는 퇴임 인터뷰 ‘예약’을 흔쾌히 수락했었다.

    지난 2일 서울 북촌의 한옥 문화 공간인 다사헌(多士軒)에서 만난 안대희는 “판사는 관용과 겸손함을 갖고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하며 검사는 원칙과 자존심, 순수함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했다. 꼿꼿하고 고지식한 줄만 알았던 그에게서 “잡기(雜技)에 능하다”는 뜻밖의 고백도 나왔다.

    ‘국민검사’안대희 대법관이 35년 공직 생활을 마친다. 그는 지난 2일 서울 북촌의 한옥‘다사헌’에서 Why?와 단독 퇴임 인터뷰를 갖고“판사는 겸손과 관용을 갖춰야 하며, 검사는 원칙·자존심·순수함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한상대 검찰총장은 안 대법관에 대해“부패척결을 향한 치열한 노력과 불퇴전의 의지로 검사의 혼(魂)을 일깨운 분”이라고 했다. /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경청하는 사람이 수사·재판 잘해”

    ―다음 주에 대법관 퇴임식이 열립니다.

    “검사로 끝날 줄 알았는데 운 좋게 대법관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에 검찰 출신 손님으로 온 게 아니다. 내가 주인이다’고 생각했지요. 최종적인 법령 해석을 담당하는 자부심도 느꼈고요. 그런데 대법관 업무량이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일이 그렇게 많습니까.

    “대법관 한 명이 한 해 2700여개의 사건을 맡습니다. 하루에 7건 이상을 처리하는 셈이지요. 어떤 대법관은 6년간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진다고 해요. 대법관을 보좌하는 재판연구관들은 ‘노비’라고 불릴 정도입니다. 사건 담당 건수를 획기적으로 줄이지 않고선 최고 법원 기능을 수행하기가 힘들어요.”

    ―대법관을 많이 뽑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에요. 대법원의 중요 업무가 법령의 해석과 통일입니다. 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으로 구성된 전원합의체를 통해 최종적인 법령 해석을 내리는데 대법관이 50명쯤 된다면 합의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대법원으로 오는 사건 수를 제도적으로 줄여주는 게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기억나는 판결이 있다면.

    “대형 할인마트들이 납품업자들에게 판촉사원의 인건비를 전가하는 행위를 불공정 행위로 판단했습니다. 성희롱 혐의로 기소된 증권사 지점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돌려보낸 사건도 기억에 남네요. 지점장이 부하 여직원 8명을 희롱했는데, 조직 단결 차원에서 했고 고의성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제가 봤을 땐 고의성이 현저했고 오히려 조직의 역량을 떨어뜨리는 행위라고 봤습니다. 난민 인정 사건에서 ‘박해’의 개념 정의를 처음 제시한 적도 있었네요.”

    ―검사 출신 대법관입니다. 법원과 검찰이 구속영장 문제로 다툴 때가 많았는데.

    "그 점에서 저는 법원과 견해가 다릅니다. 수사기관 판단을 존중하는 게 맞는다고 봐요. 구속 후에도 석방될 수 있는 여러 절차가 있잖아요. 또 불구속 상태로 수사받다가 집행유예가 나오면 거의 무죄로 생각하는 게 우리 국민의 법 감정입니다. 구속으로 실질적 처벌 효과를 볼 수도 있습니다."

    ―판사 검사 둘 다 했습니다. 좀 다르지 않던가요.

    "법률가라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판사뿐 아니라 검사도 법률가지요. 다만 검사에게는 좀 더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자세가, 판사에게는 절제와 겸손함, 균형 감각 등이 더 요구된다고 봅니다. 하지만 판·검사 모두 '잘 들어야' 성공할 수 있어요. 남의 이야기를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이 수사 잘하고 재판 잘합니다."

    ―사법연수원 다시 간다면 검사 하겠습니까 판사 하겠습니까.

    "하하하. 검사 하렵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직업이 좋아서 택한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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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짱’팬클럽 - 대선자금 수사 당시 안대희 중수부장의 팬클럽 회원들이 보약과 쌀을 들고 대검청사를 찾았다. /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안짱’팬클럽 - 대선자금 수사 당시 안대희 중수부장의 팬클럽 회원들이 보약과 쌀을 들고 대검청사를 찾았다. /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안대희' 하면 '중수부장'과 '대선 자금'이란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당시 정치인들이 저를 최고 권력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반박했습니다. 제가 가진 건 권한이 아니고 의무밖에 없다고. 원칙에 따라 수사하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었어요."

    ―팬클럽까지 생길 정도였지요.

    "시장 상인이나 종교인들이 그러더군요. 수사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국민으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당시 송광수 검찰총장과도 호흡이 잘 맞았다고 들었습니다.

    "송 총장이 바람막이 역할을 해줬습니다. 안 그랬으면 수사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노 대통령 "문지방을 두 번 넘어왔다"

    대검 중수부는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 8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대선자금 사건을 수사했다. 당시 정권 실세였던 안희정·최도술씨를 구속하는 등 정치인 40여명을 기소했고, 이들에게 돈을 준 대기업 총수들을 줄줄이 소환했다. 검찰의 거침없는 행보에 '검찰 르네상스 시대'라는 말까지 나왔다. 당시 수사 라인은 송광수 총장과 안대희 중수부장, 문효남 기획관으로 이어지는 지휘부 아래 여러 맹장(猛將)들이 포진했다. 지난해 한화·태광그룹 수사 도중 사표를 던진 강골(强骨) 남기춘 전 서부지검장이 중수 1과장이었고, '유죄만'이라는 별명을 가진 유재만 전 서울지검 특수1부장이 중수 2과장이었다. '라스트 사무라이' 김수남 서울남부지검장이 중수 3과장이었고, '재계 저승사자'로 불렸던 이인규 전 중수부장이 원주지청장에서 수사팀으로 차출됐다. '안대희 사단'은 두 번의 정권을 거치며 우리나라 특수수사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팔팔한 권력'에 대한 수사였죠. 압력이 대단했을 텐데요.

    "피부로 느껴지는 건 없었습니다. 간접적으로 '섭섭하다' 뭐 이런 식의 말은 나중에 들은 적이 있지만 '누구를 어떻게 해달라'는 주문 같은 것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사법시험 동기죠. 중수부장 잘못 뽑았다고 하지 않던가요.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지만 대선자금 수사 직전에 나라종금 사건을 처리하면서 안희정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두 번이나 청구했는데 법원에서 기각됐어요. 그 뒤 전국 검사장회의가 청와대에서 열렸는데 노 대통령이 '문지방을 두 번이나 넘어왔다'고 하더라고요. 검찰에 대한 질책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잘못했다고 하진 않았지만 대통령께서 많이 섭섭했던 모양이에요."

    ―'소년 급제'했는데, 대학 가서 공부만 했나요?

    "운이 좋았지요. 대학 1학년 때 시험 삼아 봤는데 1차 합격자 명단에 포함됐더라고요. 내친김에 2차 시험을 준비했고 3학년 초에 최종 합격을 했습니다. 그해(1975년) 가을 사법연수원 들어갔고 법무관을 한 뒤에 바로 검사로 임관했지요."

    ―1학년이 사시 준비한다면 당시엔 너무 이른 거 아닙니까.

    "대학 동기들은 제가 시험 준비하는 거 몰랐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집에서 고시 공부하고 등교했지요. 저녁 되면 친구들과 놀았고요. 사시 준비한다고 요란 떨다가 떨어지면 창피할 것 같아 조용히 공부했습니다."

    ―대학은 제대로 졸업했습니까.

    "지금은 좀 후회가 됩니다. 졸업하지 못했어요. 중퇴했지요. 나중에 졸업해보려고 애써봤는데 일에 쫓기다 보니…."

    ―최종 학력이 고졸입니다.

    "하하. 졸업만 따지면 그렇네요."

    ―평검사 시절 기억나는 사건이 있다면?

    "1981년인가 서울지검 특수1부에서 저질 연탄 사건을 수사했어요. 당시 중산층도 연탄을 땠으니 큰 화제가 됐던 사건이었지요. 전두환 대통령이 서울지검장에게 격려 전화를 할 정도로 수사 초기 반응이 좋았는데 점점 일이 꼬이더라고요. '국내 연탄업계를 다 망하게 한다' '경제 망치는 수사다'는 식의 뒷말이 나왔습니다. 나중에 그 수사를 지휘했던 간부들은 대부분 좌천성 인사를 당했고 한 달 뒤 검찰총장까지 옷을 벗었지요. 수사 때마다 기업들이 볼멘소리하는데 저는 그들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연탄 사건 뒤에 연탄 품질도 좋아지고 업체들도 망하지 않았습니다."

    ―무척 억울했겠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5공 시절에 '경제사건은 허락받고 수사해야 한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흔히 검사를 비판할 때 공명심이나 출세욕에 사로잡혀 수사한다고 하는데 검사가 출세를 원하면 민감한 수사는 아예 하지 않습니다. 검사는 직업 걸고 수사하는 겁니다. 매우 위험한 직업이지요. 생즉사 사즉생(生則死 死則生) 각오로 임해야 수사가 성공하지 사심을 앞세우면 수사 결과가 절대 좋을 수 없습니다."

    ―속전속결, 정면 돌파 스타일의 수사를 많이 했는데.

    "심재륜 선배의 말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수사는 시간과의 경쟁이다. 틈을 주면 검사가 찔린다. 전투가 아니라 전쟁이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말이었지요.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고 난 뒤에 강공으로 전환하는 겁니다. 승산 있다고 확신이 설 때 돌격해야지, 무모하게 나서면 수사팀 전체가 전멸합니다."

    ―옛날 검사들은 피의자를 마구 구타하고 그러지 않았나요?

    "사건 수없이 해봤지만 구타하거나 강압 수사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자백을 잘 못 받는 검사로 알려질 정도였어요. 다른 증거를 준비해서 혐의를 입증하는 편이었지요."

    ―대형 입시학원 비리 수사도 했습니다. 민생 수사를 많이 했군요.

    "서민생활과 밀접한 사건이 좋은 사건입니다."

    ―중간 간부 시절 화려한 경력을 가졌지만 검사장 승진에서 두 번 '물'을 먹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째 도전에서 검사장 못 되면 옷 벗는 게 관행입니다. 하지만 이명재·송광수 선배가 남아 있으라고 당부하더라고요. 후배들도 말리고요. 안 나가고 버티자니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1년 반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물었지요. 그때 담배 건넨 후배가 지금 중수부장인 최재경입니다."

    ―승진 못 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원칙 주장하고 그러니 곱지 않게 본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제가 부덕한 탓입니다. 결과적으론 '막차' 타고 검사장 됐으니 관운이 있는 편이지요."

    경기고 재학 당시의 안대희 대법관

    ◇24년째 같은 아파트, 재테크 몰라

    ―장래 희망이 검사였습니까.

    "어렸을 땐 그냥 공무원이 되고 싶었어요. 검사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사시 합격하고 나서 법무관 시절이었지요. 수사를 해보니까 검사 역할이 중요하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도 크더라고요. 역동적으로 살 수 있는 점도 매력적이었고요."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 들었나요?

    "부산고검장 시절 모교인 부산교대부속초등학교에 갔었는데, 은사께서 앞으로 'B급 학생'도 관리를 잘해야겠다는 농담을 하더라고요. B급 학생이 바로 접니다. 공부도 반에서 중간쯤 했어요. 회사 다니던 아버지가 서울로 발령이 나서 혼자 부산에 남아 중학교에 다녔는데 학업하고는 완전히 담을 쌓았습니다."

    ―공부 안 하고 무엇을 했습니까.

    "(머뭇거리다) 노름을 좋아했어요."

    ―도박이요?

    "화투로 하는 거 있잖습니까. '섰다' 뭐 이런 거. 타짜들 만나 하숙비 모두 날린 적도 있어요. 성적은 계속 떨어지고 생활이 그 모양이니 참다못한 부모님이 저를 서울로 끌고 왔지요. 숭문중학교로 전학 왔습니다."

    ―서울 와서 마음을 잡았습니까.

    "정말 열심히 공부했지요. 경기고등학교에 합격했습니다. 경기고에 가니 반 친구들이 비틀스 노래 듣고 선생님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하고, 촌놈이 받은 문화적 충격이 컸습니다."

    ―의외로 낯을 가리고 소심하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간은 크지만 참새 같은 심장을 갖고 있다고나 할까요. 허허허. 공적인 자리에선 적극적이지만 사석에선 조용한 편입니다. 주로 구석 자리를 찾다 보니 일부 친구들이 저에 대해 '소극적 성격'이라고 합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말이죠."

    ―'안대희' 하면 놀 줄 모르고 공부나 일만 하는 사람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들기는 합니다.

    "(손사래를 치며) 절대 아닙니다. 홍대(홍익대) 앞에 자주 갑니다. 딸이 저보고 '홍미'라고 놀려요. 홍대 물 흐리고 다니는 미꾸라지래요. 삼청동 북촌에도 놀러다니고요."

    ―홍대에는 누구랑 가서 뭐 합니까.

    "대부분 집사람이랑 가요. 떡볶이, 오뎅 먹고 일본식 선술집도 들릅니다. 밖에서 내부가 훤히 보이는 노래방 있지요. 거기도 몇 번 갔습니다."

    ―무슨 노래를 부르는데요.

    "예전엔 싸이의 '낙원'을 즐겨 불렀고 요즘은 에픽하이의 '트로트'라는 노래를 부릅니다. 음치라 잘 부르진 못하지만 열심히 불러요. 걸그룹 티아라 노래도 좋아합니다."

    ―오늘 두 번 놀랍니다. 노름에 놀라고 노래에 놀라네요.

    "얘기 나온 김에 하나 더 하면 요즘도 당구장에 가끔 갑니다. 300 정도 치지요. 골프·테니스·바둑도 즐기고요. 아주 잘하는 것도 없지만 못하는 것도 없는, 잡기에 능하다고 할까요. 대법관 생활이 너무 힘들어 주말이면 확실하게 스트레스를 풀려고 노력했지요. 영화도 좋아하는데 법원과 검찰을 나쁘게 묘사한 영화가 많아 안타깝습니다. 진실과 먼 비판을 받으면 힘들잖아요."

    ―자상한 남편 같아 보입니다.

    "대부분의 취미활동을 집사람과 같이해요. 마음 편하게 놀 사람이 아내밖에 없습니다. '대안이 없다'고나 할까요. 하하하."

    ―집안일도 많이 거들어줍니까.

    "전혀. 어려서부터 어른들로부터 교육받은 게 있어서 부엌일 절대 안 합니다. 그 점은 집사람이 잘 이해해줍니다."

    ―어떻게 만났습니까.

    "여동생 소개로 만났는데, 집사람은 저와 결혼하느라 외국 연수도 못 가고 회사도 그만뒀어요. 2000년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시켜줬습니다. 미안하더라고요."

    ―부인께서 다른 불평은 하지 않는지요.

    "요즘 새집에서 살고 싶다고 합니다. 서대문구 홍은동 아파트에서 24년째 살고 있거든요. 두 동짜리 아파트 1층에 사는데 산비탈에 있어서 한쪽은 반지하 비슷합니다. 50평이지만 집값이 3억원도 안 될걸요. 이사하고 싶지만 아직 능력이 안돼요."

    ―그러고 보니 재산 적은 법조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머님 것까지 더해 8억~9억원쯤 됩니다. 그중 순수한 제 재산이 5억원 정도 됩니다. 주식과 부동산 투자는 한 번도 해본 적 없고요. 기껏 집사람이 새마을금고에 적금 들거나 펀드 상품 가입하는 게 유일한 재테크입니다. 그나마 펀드도 매번 손해 본다고 하더라고요."

    ―차관급인 검사장과 장관급인 대법관을 그렇게 오래 했는데 재산이 너무 적은 것 아닙니까.

    "월급·수당 아껴서 착실히 저축했습니다. 5억원이면 많이 모은 거 아닌가요."

    대검찰청 중앙수사본부가 대선자금 사건을 수사했던 2003~2004년을‘검찰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중심에 송광수 검찰총장과 안대희(사진) 대검 중수부장이 있었다. 그들의 한마디에 정치권은 긴장했고 국민은 환호했다. /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판·검사 우대받던 시대는 지났다"

    ―중수부장·대법관 했지만 살면서 죄 지은 적 있지요?

    "완벽한 성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양심의 가책을 받을 만한 일은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차 안 다니는 횡단보도에 붉은 신호등이 켜져 있습니다. 건너갑니까, 기다립니까.

    "일반적으로 기다리는 편인데, 지금까지 한 번도 건너지 않았다고 말할 순 없지요."

    ―검찰에 좋은 검사만 있는 건 아닙니다. 그동안 욕먹었던 검사도 많았는데.

    "검사든 판사든 후배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백 개 잘해도 한 개 잘못하면 그걸로 평가받는 게 법조인이라는 겁니다. 한 건 한 건을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원칙을 갖고 타협하지 말고 오해받을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평생 다짐하고 살아야 하는 게 검사의 숙명입니다."

    ―특수수사를 많이 하면 검사가 역풍 맞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검사들은 특수수사보다 기획 부서에서 근무하기를 희망한다는 말이 있지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전 기획 검사에게도 늘 수사를 가까이하라고 말합니다. 검사의 본령은 수사입니다. 검사가 수사 놓으면 검사가 아니지요."

    ―요즘 법조계 환경 변화가 심합니다.

    "판·검사 우대받던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행정고시 출신보다 판·검사 월급이 더 많은데, 그건 일종의 특혜예요. 개인적으로 우수한 인재들이 법조계로 몰리는 데 반대합니다. 인재들이 골고루 퍼져야 사회가 더 발전할 수 있다고 봅니다."

    ―퇴임 후 계획이 어떻게 됩니까?

    "9월부터 6개월간 일정으로 미국 스탠퍼드 대학 아시아태평양연구소 방문 연구원 자격으로 떠납니다. 아내랑 둘이 가지요. 귀국해서 뭘 할지는 아직 정해진 게 없어요."

    ―아직 만 57세입니다. 한창 일할 나이인데, 공직에 더 있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글쎄요. 누가 시켜줘야 하는데, 이젠 시켜줄 사람도 없을 거 같아요. 하하하."

    ―혹시 정치에는 뜻이 없는지요?

    "현재로선 전혀 생각이 없고요. 개인적으론 대법관 출신이 정치하는 게 좀 부적절하다고 보는데, 그 생각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요."

    ―자신을 보수주의자로 봅니까? 진보주의자로 봅니까?.

    "보수와 진보라는 그 말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요. 보수와 진보의 이념이 충돌할 때 법관이 판단을 해줘야 하는데 편향적인 생각을 가진다면 곤란하지요. 원칙론자나 개혁론자로 불러주세요."

    인터뷰 말미에 '법조계에 전관예우 관행이 있지 않으냐. 후배들 부담 주기 싫어 개업을 미루느냐'고 묻자 그의 답변은 이랬다. "제가 전관을 예우해준 적이 없는데, 예우받을 자격이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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