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지 5년 안에 이혼하는 사람 중 절반 이상이 예단 때문입니다."
이혼 소송자들을 자주 만나본 판사와 변호사가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지난 18일 서울 서초동 한 법률사무소 회의실에 박종택(47)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와 김삼화(50)·김수진(45)·이인철(39) 변호사가 마주 앉았다. 대한민국 혼례문화에서 예단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짚어보는 난상토론이었다.
―"옛날에도 예단 때문에 갈라서는 사람은 있었다. 하지만 소위 '사'자 들어가는 신랑감이나 일부 부유층 얘기였다. 그런데 200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예단 갈등이 서민까지 번졌다. 요즘 중산층 가정도 명품 가방을 주고받는다. 부자가 아닌 사람들까지 '남들도 다 하더라'며 밍크코트를 탐낸다."
―"이렇게 된 가장 큰 화근은 집값이다. 예전엔 10년 벌면 집 샀는데 요즘은 10년 벌어도 못 산다. 부모 도움 없이는 집을 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부모가 노골적으로 개입하게 된 것이다."
―"한 여자 의뢰인은 시어머니가 그냥 샤넬 가방 사오라는 것도 아니고 '샤넬 가방 중에 무슨 가방 사오라'고 콕 집어주더라고 했다. 세탁기도 '○○브랜드 ○○모델이 좋다'고 적어주더란다. 또 다른 여자 의뢰인은 결혼 직후 친정아버지가 입원했다. 시어머니가 병문안 와서도 계속 '결혼 전에 주시기로 한 돈이 아직 안 왔다'고 보챘다."
―"한 남자 의뢰인이 이혼하면서 '시원하다'고 했다. 처가에서 예단을 10억원 가까이 보내 그동안 찌개가 짜도 짜다는 말을 못하고 살았다더라. 또 다른 남자 의뢰인은 여자가 집 사온다길래 대출까지 받아서 각종 명품을 3000만원어치 사줬다. 여자가 집을 사오긴 사왔는데 여자 명의로 사오는 바람에 '왜 네 명의로 해왔느냐'고 따지다 결국 이혼했다."
―"지금 이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부모가 1950년대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다. 이들은 한마디로 돈의 위력을 아는 세대다. 단칸방에서 출발해 고도 성장기에 집 한 채씩 마련했고, 그걸 토대로 현재의 자산을 모았다. 이들은 대부분 아들·딸 구별 않고 둘만 낳아 열심히 키웠다. 자식이 대학에 가면 교수에게 전화해 '학점 잘 달라'고 했다. 자식이 취직하면 상사에게 전화해 '우리 애 잘 봐달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결혼한 뒤엔 손을 떼야 하는데 관성이 있어 계속 관여한다. '너희들 일주일에 몇번씩 잠자리하니?' '승진 시험이 있으니 이번 주는 각방 써라' 같은 참견까지 서슴지 않는다."
―"반면 자녀는 으레 그렇게 간섭받고 사는 줄 안다. 자녀 세대는 1970년 후반~1980년대 초반에 태어나 IMF 외환위기 직후 사교육을 많이 받고 자랐다. 스펙 경쟁하느라 취업하는 나이가 늦고, 취업 자체도 쉽지가 않다 보니 결혼할 때 은근히 '이참에 부모가 한몫 챙겨줬으면' 한다. 친구들 결혼도 부모의 지원을 잣대로 평가한다. '○○이 결혼 잘했다'고 하면 십중팔구 잘사는 집 자식과 결혼했단 얘기지 멋진 상대와 결혼했단 얘기가 아니다. 부모 지원으로 풍족하게 결혼하는 걸 두고 '혼(婚)테크'라는 말까지 부끄럼 없이 쓴다."
―"전 국민이 예단 때문에 스트레스받는다. 5년 미만 이혼은 절반 이상 예단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10년 넘어 이혼하는 사람도 예단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현재 겪고 있는 갈등에 대해 한참 얘기하다가 '실은 10년 전 결혼할 때부터 시어머니가 예단 적게 해왔다고 이런저런 말을 했는데…' 하고 거슬러 올라간다."
―"문제는 그게 다 헛돈이라는 점이다. 결혼해서 몇년 된 집 가봐라. 웨딩사진은 벽장에 들어가고, 애 사진이 붙어 있다. 명품 받아봤자 살림하다 보면 차고 나갈 일도 별로 없다."
―"집값을 분담해 아들 가진 부모의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 예물·예단에 쓸 돈 있으면 차라리 자녀에게 그냥 주는 게 낫다. '얼마 줄 테니 너희가 알아서 마음대로 생활 기반을 마련하라'고 하면 자녀도 그 돈을 귀하게 쓴다. 부모가 아니라 당사자 두 명이 결혼의 주인공이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