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논단] '멘붕' '듣보잡' 쓰며 피폐해지는 우리 정신세계

조선일보
  • 문정희 시인·동국대 석좌교수
    입력 2012.07.01 23:03 | 수정 2012.07.02 17:38

    외국에까지 퍼져 나가는 한국의 축약된 변종 유행어
    저급하고 적대적인 언어는 천박한 속물사회의 현상
    언어의 흙탕물 거둬내고 뒤틀린 모국어 살려내야

    문정희 시인·동국대 석좌교수
    얼마 전 '예술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을 시작으로 독일 튀빙겐과 베를린에서 한국 작가 낭독회가 있었다. 낭독회는 매회 뜨거운 관심 속에 진행되었다. 한국의 국력과 이미지 상승도 실감되었다. 어쩌면 달라진 것은 먼저 우리 스스로 같기도 했다. 예전과 다른 자신감과 활력을 숨길 수가 없었다. K-팝처럼 흥분된 팬들이 몰려드는 무대는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진지하고 지적인 분위기에서 시종 깊은 여운을 참가자 서로에게 안겨주었다. 청중이 교포나 유학생만이 아닌 그 나라의 젊은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던 것도 이전과 다른 점이었다. 시인 휄더린의 숨결이 가득한 유서 깊은 대학도시 튀빙겐에서는 강연 후에 분단문제를 포함한 의미 깊은 질문들이 쏟아졌고 책 사인회도 곁들여졌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열린 베를린 한국문화원 낭송회 때의 일이었다. 역시 홀을 가득 메운 청중의 열기 속에 시 낭송을 마치고 다소 흥분된 기분으로 객석으로 내려왔다. "와, 멘붕입니다. 멘붕!" 본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여교수가 덥석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멘붕? 독일어인가? 순간 얼떨떨한 내 표정을 본 그녀는 자신의 최신 언어 감각에 만족한 듯이 신나게 '멘붕'을 설명했다. 요즘 한국에서 잘 쓰는 말로 '멘털(mental)이 붕괴되었다'는 뜻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크게 감동을 받았다'는 뜻으로 쓴 것 같았다. 괴기(怪奇)한 한국의 시류(時流) 언어를 독일의 한국문학 강연장에서까지 듣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오늘의 한국을 읽기 위해 관련 한국 사이트를 매일 검색한다는 그녀에게 우리의 부끄러운 속옷 자락을 그대로 들킨 것 같아 무참했다.

    언어는 시대에 따라 태어나고 죽는 생명과 같은 존재이다. 유행어 없는 시대 또한 없었다.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 여기저기에서 쏟아지는 소통 부재의 변종(變種) 언어는 참으로 난감하다. 이 축약된 변종 언어들은 상당한 파괴력을 가지고 날마다 가짓수를 불리며 겁 없이 떠다니고 있다.

    한 사회의 가치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언어를 구사하고 살았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 경제적으로 조금 허리를 펴게 되었다 해서 우리가 이토록 피폐하고 천박한 언어로 삶과 정신을 표현해야 할까. 눈만 뜨면 TV와 인터넷에서 마구 쏟아져 나오는 개그 언어, 저질 지하철 언어, 학교 폭력 언어를 보며 우리 사회가 우울증과 공황 장애와 자살 충동으로 병들어가고 있는 것은 바로 저런 저급한 언어에서 기인한 부분도 적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깊게 해보았다. 게다가 정치인들의 핏발 선 적대적 언어를 포함하여 거품 많은 사회에서 횡행하는 진정성 없는 언어가 적어도 오늘을 사는 한국 사회의 일부를 이루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300년 전의 오솔길이 어제처럼 보존된 도시, 신성(神聖)처럼 빛나는 대학과 전통과 지성으로 묵묵한 도서관의 불빛이 자부심을 키우는 도시, 골목 끝에 아름다운 고서점이 있는 도시에서 오늘날 한국의 현란한 속도와 부족한 언어의 용량을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빠른 경제 성장과 인터넷, K-팝의 역동성을 아무리 자랑해 보아도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인 것이다.

    고급문화가 바탕이 되지 않은 사회의 활력이란 자칫 가벼운 소비와 물량 가치에서 오는 시장의 활력이요, 그것은 곧 속물사회의 현상일 수밖에 없다. 괴테와 릴케를 읽고 브레히트 연극을 보고 자란 사람들과 '왕따' '듣보잡' '된장녀' '멘붕' 등의 생경한 신조어(新造語)를 구사하며 욕망을 날 것으로 표출하며 사는 삶, 남을 제치기에만 급급한 경쟁사회에서 자란 삶이 근본적으로 다를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 한 잔도 생수를 마시려 하고, 입에 들어가는 음식물은 유난히 유기농과 무공해를 따지는 사람들이 정작 정신의 양식을 채우는 데는 왜 이리도 소홀할까. 옷은 명품으로 차려입고 싶으면서도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는 정작 빈약하고 피폐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모처럼 유럽 젊은이들의 귀에 한국의 시(詩)를 들려주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 사회에 범람하는 언어의 흙탕물과 치졸하게 뒤틀려가는 모국어(母國語)의 현실을 생각하니 진땀이 났다.

    인간은 언어로서 존재한다. 문학은 그 언어가 최상으로 세련된 형태이다. 진지함으로 가득했던 한국 작가 낭송회에서 한국시의 씨앗을 받아간 독일어권 젊은이들은 지금쯤 그 씨앗을 어느 정신의 텃밭에다 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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