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임수경에게 '변절자'로 지목된,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

조선일보
  •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12.06.11 03:37 | 수정 2012.06.11 17:04

    "임수경은 從北 아니었고… 이정희는 너무 착해서 끌려간 것"
    北, 문익환 목사를 '프락치'로 몰아… 지하 종북세력이 이에 가세
    문성근의 통합 노력이 이해 안 돼
    천안문 사건의 주역 王丹 왈 "나는 중국에서 친미운동 했다, 자유의 여신상이 나의 이상형"

    "당신은 '변절자'인가?" 묻자, 새누리당 하태경(44) 의원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뒤 "임수경씨가 그렇게 말해…"라며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렇다, 아니다로 답해라.

    "…북한 정권 입장에서 보면 나는 변절자겠지. 하지만 북한 동포를 기준으로 하면 친구로 돌아온 것이고."

    ―"대학 시절의 동지를 배신했다"는 자책감을 가져본 적이 없나?

    "전혀 없다. 변절의 다른 표현은 '전향'인데. 나 자신은 당당하다. 과거 동지들 관계에서 위축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자책감이 있다면 후배들을 제대로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사상 논쟁을 해왔기 때문에 그런 욕에 익숙해져 있다."

    ―당신이 '변절자'라면, 주체사상과 북한 세습 정권을 여전히 신주처럼 떠받드는 그들은 뭐라고 부르고 싶은가?

    "그들은 반민중적인 길을 가고 있다. 그걸 깨달아야 한다. 술자리에서 논쟁을 벌일 때면 '너희는 역사의 죄인이 된다. 독재 편에 서서 북한 동포를 배신하고 있다'고 말해왔다."

    하태경 의원은“눈앞의 사실에도 안 바뀌는 걸 보면서 사람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했다”고 말했다. /성형주 기자 foru82chosun.com
    ―임수경 의원은 왜 탈북자를 '근본 없는 변절자'라고 했을까? 그녀의 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수경이와는 1990년대 중반 1·2년간 교류했을 뿐이다. 그 뒤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념적인 종북(從北)은 아니었다. 굳이 추측하면 그녀는 방북해 그쪽 집권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런 우호적인 마음이 작용한 게 아닌가."

    ―탈북자에 대한 임수경 같은 시각이 우리 사회 일각에 존재한다. 당신도 그런 적이 없나?

    "한때는 나도 탈북자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북한 정권이 정통성이 있고, 비록 공산당 독재를 하지만 북한 인민을 위한 선(善)한 독재이며, 체제를 탈출한 주민은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1992년인가 탈북자 강철환(북한 정치범 수용소 출신으로 조선일보 기자를 지냈음)씨를 처음 봤을 때 멈칫했으니까, 그 뒤로 생각이 바뀌어갔다."

    그는 임수경과는 대학은 다르나 같은 학번(86학번)에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소속이었다. 1989년 6월 30일 임수경이 밀입북했을 당시, 그는 국보법 위반 혐의(이적 표현물 소지)로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임수경 방북 2년 뒤인 1991년, 전대협은 또 평양청년축전에 박성희·성용승을 방북시켰다. 이 사건에 당신이 연루돼 2년 수감됐다.

    "내가 북한과 팩스를 주고받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극비리에 진행돼 이들이 평양에 도착한 뒤에야 나도 방북 사실을 알았다. 그때는 북한에 우리 학생이 많이 갈수록 통일이 가까워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가능한 한 매년 보내자는 방침이었다."

    ―박성희·성용승은 방북 후 임수경처럼 판문점으로 바로 내려오지 못하고 베를린으로 갔다. 국내에서 지시를 한 것인가, 구속을 피하기 위해서 그런 것인가?

    "임수경 때 남북의 길을 열었고, 앞으로는 좀 더 조직적으로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는 게 우리 생각이었다. 북측 학생 대표들과 '범청학련' 조직을 만들자고 내가 제안했다. 체계적인 활동을 위해 '범청학련' 본부를 독일에 뒀고, 박성희·성용승에게 그 임무가 맡겨졌다. 하지만 이들은 북한 대표와 함께 사업을 하면서 갈등이 많아 '그만두고 돌아가고 싶다'고 호소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북측 대표가 대등하게 대화를 하지 않고, 회의 중에 탁자를 뒤엎는다든지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 합의를 해놓은 사안도 북측 지령을 받으면 뒤집었다. 그쪽 체제의 본질을 보고 환멸을 느낀 것이다. 이들은 '북한은 완전히 독재 사회다. 민주주의를 전혀 모른다. 범청학련은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다. 해체하고 돌아가겠다'고 했으나, 국내에서는 '문화 차이 때문이니 좀 지나면 좋아진다. 참고 견뎌라'고 달랬다."

    1998년 베를린에서 귀국한 전대협 대표 박성희·성용승(왼쪽에서 넷째·다섯째).

    ―이들은 1998년에야 귀국했다.

    "그전부터 생각이 바뀌어가던 나와 몇몇 동지가 '이는 문화 차이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독재에서 오는 갈등이고 하나가 되기 어렵다. 해산하고 들어와야 한다'고 총대를 멨다. 격렬한 내부 논쟁을 벌였다. 그렇게 해서 귀국했는데, 김대중 대통령 취임 시기와 맞았다. 반성한다는 입장을 밝힌 뒤 조사만 받고 수감은 안 됐다. 당시 '이들은 안기부 프락치'라는 북한의 비난 성명이 있었다. 박성희는 이민 가서 살고 있다."

    ―당신은 대학 졸업 후 1993년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 본부 의장인 문익환 목사가 만든 '통일맞이' 단체에 들어갔다. 당신은 책에서 '문 목사가 범민련으로는 북한에 계속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며 독자적인 통일 조직을 만들려고 했다'고 밝혔다.

    "요즘으로 치면 문 목사는 '종북'이 아니었다. 그분은 '북한과 대등해야 하는데 범민련으로는 대등할 수 없다. 북한과 수평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민족회의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문 목사가 범민련을 해체하려다가 '안기부 프락치'로 몰려 화병으로 숨졌다고 당신의 책에 썼다.

    "운동권 내부에서는 문 목사의 범민련 해체 생각에 대체로 동의했다. 그만큼 존경을 받던 분이었으니까. 문 목사가 김일성에게 '범민련 해체하고 통일 운동을 위해 더 크게 태어나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바로 다음 날 답신이 왔다. 범민련 북 측 본부 의장인 백인준 명의였다. '문익환은 안기부의 프락치, 안기부의 사주를 받아 범민련을 해체하려는 책동을 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팩스로 모두 문 목사에게 등을 돌렸다. 내게는 충격이었다."

    ―어떤 근거로 그 팩스가 문 목사의 사망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팩스가 온 다음 날 문 목사가 사무실에서 '내가 안기부 프락치래'라며 흥분하셨다. 소문이 지하 조직에서 퍼져 종북세력이 문 목사 욕을 하고 다녔다. 돌아가신 날 점심 자리에서 하필 프락치라고 욕하는 사람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문 목사가 '내가 프락치냐'고 고함치다가, 밥알이 기도를 막아 쓰러졌다. 병원에 옮겼으나 환자가 많아 입원을 못했다. 차 안에서 잠깐 회복된 뒤 댁으로 들어갔는데 그날 돌아가셨다."

    ―당시 바깥 사회에는 안 알려졌다.

    "팩스를 받고 정말 며칠 안 돼 돌아가셨다. 내부에서는 다 퍼졌지만 바깥에는 안 퍼졌다."

    ―지난 총선에서 문 목사의 아들 문성근씨와 맞붙을 뻔했다.

    "문 목사는 내 멘토 같은 분이었다. 문성근씨에 대해 이해가 안 됐던 것은, (한숨을 내쉬며) 이 이야기를 해야 되나…. 문성근씨는 민주당통합진보당 합당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뿌리는 문 목사를 돌아가시게 한 세력이다. 자기 아버님을 돌아가시게 한 세력을 동지로서 합당할 수 있느냐, 그런 의구심이 있었다."

    ―문 목사 죽음에 그런 배경이 있었다는 것을 사실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책에 이런 내용을 쓰고 문성근씨를 만났다. '내가 아는 내용은 이렇고 해서 책에 썼다. 가족과 상의 없이 해서 마음에 부담이 됐다'고 말했다. 문성근씨는 '나도 그 점을 알고 있다. 팩트니까 그렇게 해도 무방하다'고 답했다."

    ―당신은 왜 생각을 바꾸게 됐나?

    "1989년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회의가 들었다. 하지만 북한은 주체사상이니까 이와 다를 것이라는 믿음을 놓지는 않았다. 그때만 해도 정치범 수용소와 인권 탄압 실상을 잘 몰랐다. 생각의 변화는 그 뒤 1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뤄졌다."

    ―대학가 '원조(元祖) 주사파'였다가 전향한 김영환(현재 중국에서 수감 중)·홍진표씨 등의 설득을 받았다고 들었다

    "대화와 토론도 영향을 주지만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겪으면서 바뀐 것이다. 1998년인가 고려대 국제대학원에 다니면서 미국 연수 프로그램을 가게 됐다. 첫 미국행이었다.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102층)이 1931년에 지어져 있더라. 이승만 대통령이 그걸 봤을 때 친미(親美)가 안 될 수 없었구나.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초기에 유엔(UN) 기구는 좌파가 다 잡고 있었다. '수입 대체와 자립 경제'를 제3세계에 권장했다. 남미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수출 지향으로 갔다. 그런 탁월한 식견에서 우리 현대사를 다시 보게 됐다."

    ―미국 구경 한 번 한 걸로 자신을 사로잡았던 이념을 쉽게 놓아버릴 수 있나?

    "미국에서 중국 천안문 사건(1989년)의 주역인 왕단(王丹)을 만났다. 나이도 비슷하고, 감옥 간 얘기가 화제가 됐다. '왜 감옥살이 했나?' '친북 통일운동 하다가 감옥 갔다' '민주화운동이라면서 어떻게 친독재운동을 할 수가 있느냐. 나는 중국에서 친미운동 했다. 자유의 여신상이 나의 이상형이었다' '나는 반미와 친모택동을 우상으로 삼았다' '친모택동은 친독재다' 그는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의 말이 맞다. 솔직히 부끄러웠다."

    그는 고려대 국제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가려고 했다. 그때 선배가 '북한과 관련해 새로운 길을 개척해보라'고 권했다. 2000년 그는 중국 지린성 창춘(長春)으로 갔다. 지린대학에서 공부하면서 탈북자들과 접촉했다. 귀국한 뒤로 '열린북한방송'을 맡았다.

    ―종북주의자로 남은 이들은 북한의 실상을 모른 것일까?

    "외면한 것이다."

    ―이들은 지금도 외면하고 있는가?

    "나는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만나면서 하루 10시간씩 인터넷상에서 많은 글을 썼다. 과거에 같이 활동하던 친구들과 공개적인 논쟁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내가 본 걸 말하기 때문에 내 생각으로 넘어올 줄 알았다. 안 바뀌더라고. 그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임수경을 밀입북시킨 이가 임종석 전대협 의장이었다. 그 임수경을 이번에 민주당 비례대표로 집어넣은 이가 또 임종석(당시 민주당 사무총장)이었다. 이 둘의 관계도 그렇고, 특정 대학 운동권 조직이 주류가 된 통합진보당 사태를 봐도, 뭔가 시간이 정지된 느낌을 받지 않는가?

    "세월이 흐르면서 다들 조금씩 바뀌어왔다. 과거에는 열 명 중 한 명이 바뀌었다면, 지금은 열 명 중 다섯 명쯤 바뀌었다. 나처럼 싸우는 사람도 나오지 않았는가."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도 당신의 대학 1년 후배고 서울대 여학생회 회장을 지냈다. 당신이 1992년 목포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이정희의 편지를 받았다면서?

    "면회도 한 번 왔다. 그때는 친하게 지냈다. 착하고 차분한 학생이었다."

    ―통합진보당 사태 때 이정희는 싸늘한 기계처럼 행동해 '로봇' 별명을 얻었다.

    "개인주의가 강한 사람과 집단주의가 강한 사람이 있다면, 내가 아는 이정희는 후자다. 집단이 잘못 가면 빠져나와 싸워야 하는데, 사람이 너무 착해 시키는 대로 간 것이다."

    ―작년 이맘때 이정희에게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당신이 왜 북한인권법 통과를 결사반대하느냐'는 내용의 공개 편지를 띄웠다. 연락이 있었나?

    "없었다."

    ―그런 소신이라면 "북한 인권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외교적 결례이며 북한인권법은 대북 삐라 살포 지원법"이라는 이해찬 대표에게는 왜 공개 반박하지 않나?

    "당시 경선에서 밀리니까 지지 기반을 얻으려는 꼼수 정도로 봤다. 이 대표가 총대 메고 북한인권법에 결사반대할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는 정치인이 되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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