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행 아시아나의 13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조너선 프랜즌(53·Franzen)의 장편소설 '인생수정'(The Corrections·은행나무). 복도도 창가도 아닌 가운데 낀 이코노미 좌석이었지만, 옴짝달싹 못하는 그 자리가 오히려 고마웠다. 온전히 책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75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 두 번째 기내식을 먹을 즈음 동났다. 그리고 곧 즐거워졌다. 몇 시간 뒤면 이제 이 작가의 실물을 만날 수 있다!

1년을 기다려온 만남이었다. 지난해 이 작가의 장편 '자유'(Freedom)가 한국에서 출간되었을 때는 이메일 인터뷰였다. 범죄 스릴러나 뱀파이어 등 장르 소설만이 상업적으로 득세하는 미국에서 "진지한 순문학으로 베스트셀러가 가능하다"는 신화를 쓴 작가. 최근 10년간 시사 주간지 타임의 표지 모델(2010년 8월)이 된 유일한 소설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휴가 갈 때 챙겨 넣는 소설의 작가. 1년 전 인터뷰에서 그는 "인터넷이 연결된 작업실에서 좋은 소설을 쓰기는 어렵다"고 말한 문학 지상주의자였다. 그 '작가의 골방'을 직접 확인하는 것도 이번 인터뷰 목적 중 하나였다.

'뉴욕의 평창동'이라는 맨해튼 어퍼 이스트 사이드(Upper East Side). 고풍스러운 집들이 빽빽한 동네에서 프랜즌의 작업실은 소박한 공동주택의 방 한 칸, 3평짜리 스튜디오였다. 바람 넣어 만든 허름한 에어베드(airbed) 하나, 나무 책상 하나, 그리고 그 위의 노트북 하나. 1년 전 '창작 원칙'은 여전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물론(absolutely),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작가의 적!"이라고 힘차게 답했다. 길 건너 맨해튼 2번가의 지하철 공사 소음이 방해하지는 않느냐고 묻자 "글 쓸 때는 20년째 귀마개나 소음 제거 헤드폰을 낀다"고 싱긋 웃었다.

'인생수정'이 미국에서 출간된 것은 2001년. 한국에서는 작가의 최신작이라는 이유로 '자유'(2011)가 먼저 나왔지만, 그의 대표작을 '인생수정'으로 보는 독자와 평론가가 다수다. 이 책으로 작가는 '인터넷 시대의 톨스토이'(슬레이트) '위대한 미국 소설가'(타임)라고 호명되었고, 사멸해가던 미국 본격 문학의 기수로 떠올랐다. 뉴욕타임스부터 CNN까지 만장일치에 가까운 열광이었고, ' 열풍(Franzen Frenzy)'이라는 조어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이 소설을 쓸 당시의 문학적 야심(野心)을 물었다. 그의 답변은 '문학의 건재' '문학의 부활'이었다. "90년대 미국인은 문학을 잘 읽지 않았어요. 대중문화에 자리를 내준 지 오래였고, 심지어 제약업계는 새로 개발한 항우울제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공언하던 시절이었죠. 전 화가 났어요. 삶에 대한 위로와 각성은, 문학이 하던 역할이었거든요."

프랜즌은“나는 소설가의 팀을 위해 뛰고 있는 선수이며, 소설이 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지난 10년간 그의 아지트는 뉴욕 2번가에 있는 3평 골방.‘인생수정’과‘자유’로 그는 자신의 소망을 실천했다.

'프랜즌 열풍'의 해프닝으로 '토크쇼의 여왕'이었던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Winfrey)와 오해가 있었고, 화해했다. 작품 '인생수정'이 '베스트셀러의 보증수표'라는 오프라의 북클럽 선정 도서에 뽑혔지만, 프랜즌이 "내 독자와 오프라의 독자는 조금 다른 것 같다"고 우려했던 것. 파장은 엄청났다. 그는 '엘리트주의자' '지적 속물'로 낙인 찍혔다. "당시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면의 '공공의 적 1호'가 오사마 빈 라덴(2001년은 9·11의 해였다)이었고, 저는 '공공의 적 2호'였습니다. 이 작품 이전까지만 해도 전 철저한 무명작가였죠. 사실 이 해프닝의 많은 부분은 아무도 제 얘기를 듣지 않던 시절과 모두가 저를 주목하던 시절의 차이가 빚어낸 오해였어요. 하지만 곧 전화위복이 됐습니다. 결과적으로 작품을 읽은 독자들은 제 진심을 알게 되었고, 오프라와도 화해를 했으니까요."

'인생수정'의 미국 판매 부수는 대략 160만. 순문학으로는 경이로운 숫자지만, 그 숫자보다 작가에게 더 중요한 의미는 '문학이 건재함을 입증한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 디지털 시대일지라도 그 본질적 고립으로부터 인간을 위로하고 각성시키는 예술은 문학이라는 사실을 자기 작품으로 입증했다는 작가적 프라이드다. 그는 요즘 과학자들이 인간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고 발표하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고 했다. 특히 인간의 성격이 단일하지 않고, 여러 자아를 지니고 있다는 식의 연구들이 그렇다.

프랜즌은 "과학자들이 진작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봤다면 그런 수고를 덜었을 텐데…"라며 씩 웃었다. 프랜즌을 읽어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인간을 이해하고 싶다면, 가장 알기 어려운 존재가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더욱더.

[프랜즌 소설 '인생수정'은]
19C 문법으로 쓴 21C 고전… 美중산층 2代 통시적 조망

21세기 소설 문법을 거스르고 19세기 근대문학 문법으로 쓰인 '당대의 고전'. 미국 중산층 2대를 통시적으로 조망하는 거대한 서사다. 앨프레드와 이니드 부부 그리고 이들의 세 자녀의 가족사를 통해 인간과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사회 전체를 품는 대형 풍속화이면서 동시에 주인공의 감정과 결을 세심하게 그려낸 세밀화라는 점에서 희귀하다. 2001년 미국 전미도서상 수상작. 부모 자식 간의 갈등, 가족의 해체, 사랑과 결혼과 불륜, 삶의 우울과 노화와 죽음, 이 모든 오점투성이의 인생에 대한 총체적 '수정' 작업이 '인생수정'에서 치열하게 펼쳐진다.

75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냉소와 유머, 직설과 풍자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프랜즌의 문장은 흡인력이 매우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