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주 문화부장

건달 세계에서는 보스가 부하들 밥을 먹인다. 대신 조직원들은 충성을 바친다. 조직원은 돈이 좀 있다고 대장 밥값을 함부로 내서는 안 된다. 건방 떤다고 혼난다. 밥값은 권력자의 의무이자 권리인 동시에 표식이다. 다른 조직에서도 비슷하다. 상명하복(上命下服)의 복종체계는 기본적으로 밥 먹이는 일에서 출발한다.

때로 약자가 밥값을 낼 때도 있다. 청을 들어주는 사람과 부탁하는 사람, 즉 '갑(甲)·을(乙) 관계'에서는 약자인 을이 밥값을 낸다. 그러나 이 밥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 밥값에 상응하는 특혜의 제공이 있어야 한다. 여기까지가 사회 일반에서의 '밥값' 역학(力學)이다.

요즘 인터넷에서 '밥값' 논쟁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이때 밥값은 데이트 밥값이다. 먼저 '커피값녀'. 소개팅을 했다는 남녀가 카카오톡을 통해 언쟁하는 내용이 대중에게 공개됐다. 간추리면 남자는 밥값으로 7만원, 극장비로 1만8000원, 음료수값으로 4000원 등 총 9만2000원을 썼고, 이 남자가 여자에게 커피값 7000원을 내게 했다는 것이다. 여자는 "남자가 커피값을 내라는 말을 했다고 했더니 친구들도 어이없어하더라"며 남자에게 항의하고, 남자는 "내가 쓴 돈은 생각 안 하느냐"는 식의 대화가 오간다.

한 여성 방송인은 "남자들이 한 여자만 만나는 게 아니라 여러 여자를 만날 때 더치페이(반반 부담)를 한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면 밥을 먹는데 왜 초반부터 더치페이 하자고 하겠느냐"고 했다. 또 다른 사건도 있다. 한 여성이 "밥값 더치페이는 어느 나라 매너냐. 그깟 밥값 30만원이 아까웠냐. (남자가 타는 벤츠) 차만 팔아도 밥값은 내겠다"고 험한 소리를 하고, 남자가 "왜 내가 다 내냐. 초면에 레스토랑 코스 요리 먹으러 가자는 것부터 잘못이다. 그런 소리 하면 된장녀 소리 듣는다"고 반박하는 대화 내용도 인터넷에 떠돈다.

이런 내용이 공개되면 대부분 "여자가 무개념이다. 여자 망신시킨다"는 비난이 쏟아진다. 남성뿐 아니라 많은 여성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남자가 밥값을 내면 여자가 커피값 정도는 내세요." 그러면 "그게 무슨 더치페이냐"는 반박에는 이런 답도 나온다. "여자는 화장품 사고, 옷 사고 꾸미는 데 돈이 많이 드니까 남자가 밥값을 내는 게 당연하다. 커피값을 내는 정도로도 충분한 더치페이가 된다."

그런데 그게 맞는 가이드라인일까? 여자가 남자한테 잘 보이기 위해 꾸미고, 그걸 보여주는 대가로 밥을 얻어먹는다? 여성의 미(美)와 남성의 밥값이 교환되는 이 구도는 여성을 매개로 한 다른 종류의 '영업행위'와 대체 뭐가 다른 것일까. 밥값 안 내는 여자는 남성이 자기 '보스'가 되길 바라는 걸까, 아니면 자신의 '갑(甲)' 위상을 즐기려는 걸까. 그럼, 그건 사랑인가?

남자가 돈을 내는 구도는 '남자는 돈 벌고, 여자는 못 번다'는 통념에 근거했고 오래 지속돼왔다. 그런데 사회가 변했다. 그러나 취업여성조차 비용을 반반 내면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라고 고백한다. '여자가 예쁘면 남성이 기꺼이 지갑을 연다'는 속설(俗說)을 여성 자신이 신봉하기 때문이다. 남자가 여자 핸드백을 들어주는 거의 유일한 나라, 대한민국 여성의 평균적 '밥값 철학'은 아직도 '쌍팔년' 수준이다. 여성 비하 통념에 진저리내면서도 그 통념의 부산물만은 포기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동생과 딸들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