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작가는 오직 죽은 자들과 경쟁한다"고 소설가 헤밍웨이(Hemingway·1899~1961)는 말했다. 저승의 헤밍웨이가 요즘 한국에서 자신의 작품들끼리 벌이는 경쟁을 본다면 묘한 느낌이 들 것 같다. '노인과 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 대표작들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기 때문. 올 들어 국내에서 번역·출간된 헤밍웨이 작품은 20종 4만여부로, 그 중 절반이 이미 독자들 손에 들어갔다.
◇저작권 소멸…헤밍웨이가 돌아왔다
올해 번역된 헤밍웨이 작품 수는 2002년 이후 최근 10년간 국내에서 번역되어 나온 헤밍웨이 작품 수(20여종)와 맞먹는다. 올해 초 민음사는 '노인과 바다'(김욱동 옮김)를 시작으로 '무기여 잘 있어라'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 등 장편 3권을 나란히 출간했다. 문학동네는 '노인과 바다'(이인규 옮김)를, 열린책들도 '노인과 바다'(이종인 옮김)와 '무기여 잘 있거라'를 잇달아 출간했다. 시공사도 3월부터 '우리들의 시대에'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무기여 잘 있어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장경렬 옮김)를 한꺼번에 펴내며 '헤밍웨이 대전'에 불을 지폈다.
헤밍웨이 작품은 과거에도 꾸준히 출간돼 왔다. 그러나 상당수는 저작권법이 엄격하지 않은 시절부터 출간된 책이거나 저작권 계약을 거치지 않은 '해적판'이었다. 올해 헤밍웨이 작품이 쏟아진 건 저작권 소멸 덕분. 헤밍웨이는 1961년 7월 2일 오하이오 케첨의 자택에서 엽총 자살했다. 현행 국제저작권협약은 저작권 보호기간을 작가가 사망한 해로부터 50년으로 정하고 있다. 한·EU 자유무역협정(FTA)과 맞물려 작년 7월 1일 발효된 개정 저작권법은 저작권 보호기간을 사후 50년에서 사후 70년으로 늘렸다. 하지만 내년 7월 1일까지 유예기간을 둬서 그전에 사후 50년이 되는 작가들은 기존 조항이 적용된다. 올해부턴 누구든 저작권료를 내지 않고 헤밍웨이의 책을 '합법적으로' 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동안 헤밍웨이 저작권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저작권을 갖고 있던 헤밍웨이 재단은 한국 출간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국내 출판사가 거는 전화도 잘 받지 않았다. 어쩌다 연락이 닿으면 최소 1만 달러 이상의 비싼 로열티를 요구했다. 통상 고전의 저작권은 3000~5000달러 선. 미국에서 헤밍웨이 작품을 독점 출간하는 스크라이브너 출판사와도 접근이 쉽지 않았다. 민음사 손미선 차장은 "헤밍웨이는 누구나 아는 중요한 작가라서 세계문학전집에 꼭 넣고 싶었다. 15년 전부터 계속 계약을 시도했으나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거절 의사만 받았다"고 말했다. 다른 출판사도 사정은 비슷했다.
◇'노인과 바다'의 전쟁
헤밍웨이 작품 중에서도 '노인과 바다'는 인기작이다. 올해 번역된 것만 5종에 이르고, 민음사와 문학동네 번역본은 1만부씩 팔려나갔다. 각 출판사는 세련된 표지, 새로운 번역에 공을 들였다. 출판평론가 표정훈씨는 "같은 '노인과 바다'를 여러 출판사가 번역해 내니 독자로서 선택의 여지가 많아 반갑다"고 말했다.
독자들 역시 환영하는 분위기. 그러나 일부에선 "책값은 그대로더라. 저작권이 소멸되어서 출판사들 말고 독자한테 좋은 게 뭔지 모르겠다"는 말도 나온다. 출판사들은 "종이값, 디자인값, 번역료는 그대로"라고 말했다.
손미선 차장은 "저자와 번역자가 책값의 10%를 인세로 나눠갖는다. 저작권이 소멸되면 번역자가 2차 저작권자가 되어 인세를 모두 가져간다. 출판사 입장에서 나가는 돈은 똑같다"고 설명했다. 한 출판계 인사는 "책값을 내리면 소비자들이 고마워하기는커녕 비슷한 종류의 다른 책은 왜 비싸냐고 도리어 화를 낸다. 정유사들이 기름값 내리기보다 더 어려운 게 책값 인하"라며 "저작권료를 빼고 책값을 매긴다 해도 5~6%에 불과해 8000원짜리 책이면 7500원 정도까지 내릴 수 있어 별 차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엔 헤세·포크너 저작권 풀려
내년에는 헤르만 헤세와 윌리엄 포크너 대전(大戰)이 펼쳐질 전망이다. 둘 다 1962년 사망했다. 국내 출판사들은 '데미안'과 '수레바퀴 밑에서' 등 대표작 번역에 이미 들어갔다. 문학동네는 포크너의 '압살롬, 압살롬' '음향과 분노' 등을 새로 내놓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