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되어버린 '그림 천재'를 아시오?

조선일보
  • 곽아람 기자
    입력 2012.05.30 03:25

    이인성 탄생 100돌 기념전
    조선의 고갱 - 鮮展 특선·최고상 휩쓸어
    강렬한 보색·하얀 윤곽선… 인상주의 화풍, 새롭게 소화
    불운의 삶 - 자식·첫 부인 병으로 잃고 경찰과 시비 중 총 맞아 요절

    1937년 10월 28일, 대구의 문화예술인 집결지인 다방 '아루스(ARS)'에 한 괴한이 들이닥쳐 벽에 걸려 있던 그림을 칼로 찢었다. 그림을 그린 화가가 화업(畵業)을 게을리한다는 것이 이유. 그 자리에 있던 화가는 칼을 빼앗아 괴한의 얼굴을 찔러버렸다. 경찰에서 화가는 말했다. "그자는 그림의 발을 베었기에, 나는 그자의 팔을 벨까 하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상해(傷害)죄로 처벌받을 수도 있는 사안이지만, 당시 '매일신보'는 '작품은 그의 생명'이라는 제목으로 화가의 결기를 칭송했다. 광(狂)팬이 있다는 점도 화가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요절한 '천재 화가' 이인성(李仁星·1912~1950·사진)에 얽힌 에피소드다.

    '鄕 이인성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8월 2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인성 회화 75점과 드로잉, 친지들과 주고받은 엽서 등이 소개된다. 이인성은 어린 시절부터 고향 대구에서 '그림 천재'로 이름을 날렸다. 17세 때인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鮮展)에 첫 입선한 것을 시작으로 연이은 특선에 이어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했다. 가난했지만 주변의 도움을 받아 1931년 일본 유학을 떠났고, 당시 일본에서 유행했던 반 고흐·고갱 등 인상주의 화풍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해 '조선의 보물' '화단의 귀재'라고 격찬받았다.

    이인성의 1944년 작‘해당화’. 제23회 선전 출품작이다. 여름꽃 해당화가 활짝 핀 가운데 여인들은 겨울옷차림을 하고 있는 등 연극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수수께끼 같은 작품이다. 이 작품에 대해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극성이던 시기, 어두운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상징을 사용했다는 해석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번 전시에 나온 '카이유'(1932)는 화병에 꽂힌 카라 꽃을 그린 그림. 일본에서 서양 문물 세례를 받은 이인성의 화풍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최은주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 1팀장은 "청록과 빨강의 보색 대비, 짧은 터치, 하얀 윤곽선 등은 현대의 눈으로 보면 낡았지만 당시엔 이인성만이 구사할 수 있었던 화풍이다. 이 화풍에 반한 일본 귀족들이 이인성 작품을 많이 샀다"고 말했다.

    제13회 선전 특선작인 '가을 어느 날'(1934)은 이인성의 대표작인 동시에 '민족주의 대(對) 식민주의'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는 작품. 당시 "조선의 정체성을 찾겠다"며 조선 '향토색(鄕土色)'을 추구했던 이인성은 그림에서 붉은 대지 위에 핀 시든 해바라기를 배경으로 햇볕에 그을린 상반신을 드러낸 여인과 소녀를 그렸다. 문제는 당시 선전을 주최하던 조선총독부가 '조선 향토색'을 주요 심사기준의 하나로 강조했다는 것. 화가의 '향토색'이 순수한 민족주의의 발로인지, 아니면 식민지 조선을 '반라(半裸)의 여성'으로 표상되는 미개한 땅으로 규정하려 했던 총독부의 입맛에 맞춘 건지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이인성이 후대에 이르러까지 '천재'로 기억된 것은 그의 불운한 삶과 짧은 생애도 한몫했다. 장남, 차녀, 첫 부인이 잇달아 병으로 세상을 뜨는 불행을 겪었던 이인성에게 '최후의 불운'이 찾아든 건 38세 때인 1950년 11월 3일. 술 취해 귀가하던 중 경찰과 시비가 붙었고, 약이 올라 집까지 쫓아온 경찰이 잘못 쏜 총에 맞아 이튿날 숨졌다. 한국근대미술사학자 최열씨는 "이인성은 '근대적 천재론'의 산물이다. 그의 요절이 그의 삶을 신화(神話)로 만들었다"고 했다. (02)2022-0600, 관람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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