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석 칼럼] 대통령 되겠다면 고개 들어 ‘世界’를 말하라

조선일보
  • 강천석 주필
    입력 2012.05.25 21:45

    세월 앞에 無常한 국가 흥망성쇠 겸허하게 살펴봐야
    세계 잘못 읽으면 한국 경제·안보·통일 위태로워진다

    강천석 주필

    '세계(世界)'라는 단어를 들어본 지 오래다. 기억의 필름을 아무리 되감아 봐도 이 나라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 입에서 '세계'라는 말이 흘러나오던 장면은 떠오르지 않는다. 본인들은 "녹음테이프를 다시 틀어보라. 수십 번 '세계'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며 낯을 붉히며 항의할지 모른다. 그들 말대로 대통령 지망생(志望生)들이 '세계'라는 소리는 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세계'라는 단어에 그만한 무게를 싣고 뜻을 담아 국민을 향해 이야기한 적은 없다. '세계 상황이 이렇고, 앞으로 저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니 이런 대비를 서둘러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 '세계'라는 말이 역량(力量)에 너무 부친다면 '아시아' 또는 '동북아(東北亞)'라는 단어라도 꺼낸 적이 있는 사람이라도 손을 들어보라. 몇달 후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대한민국의 정치 풍경이 이렇다. 참으로 겁(怯) 없는 나라의 소견(所見)머리 없는 정치다.

    대한민국 경제의 무역 의존도가 96.7%다. 경제의 수출 의존도는 49.7%다. 석유·가스 등의 에너지는 물론이고 철광석 등 주요 원료도 100% 수입해 쓴다. 수입 길이 끊기면 그날로 한국 경제는 손을 든다. 이 외국산 원료를 가공해서 만든 제품도 거개가 해외 시장에 내다 판다. 수출이 벽에 부딪혀도 한국 경제는 그냥 주저앉고 만다. 월급을 제대로 받는 정규직 근로자의 절대다수는 수출과 관련한 업종과 업체 소속이다. 세계 경제 동향(動向)이 근로자의 일자리와 그 가족들의 밥줄을 쥐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나라의 대통령 지망생들은―보수든 진보든, 늙든 젊든―너나없이 무엇을 심판하고 아무개와 차별화하겠다는 데만 열심이다. 그들이 입에 바르고 다니는 복지국가라는 꿈의 실현 여부가 세계 경제의 흐름에 달려 있는데도 말이다.

    지진과 화산활동은 두 개의 지각판(地殼板)이 부딪치는 경계선에서 집중 발생한다. '환태평양지진대'니 '알프스지진대'니 하는 지진 다발(多發)지역이 바로 그런 곳이다. 세계의 분쟁과 전쟁 또한 두 개 이상의 '정치적 지각'이 충돌하는 경계선을 따라 불꽃을 튕긴다. 한반도는 새롭게 고개를 드는 '중국판(板)'이 100년 가까이 세계를 지탱해온 '미국판(板)'의 아래를 직접 파고드는 세계의 몇 안 되는 지역의 하나다.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가 미중 두 신구(新舊) 세력 간의 협력과 갈등관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칭(自稱) 이 나라 대통령감들이 정치적 지진대(地震帶)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의 안보 설계로 머리를 싸매고 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사유재산(私有財産)처럼 물려주고 물려받는 북한이 언제 무슨 소리를 내며 이 나라 대통령의 어깨를 덮칠지 아무도 정확히 내다볼수 없다. 북한의 영생(永生)을 믿는 세력은 대한민국 진보당의 곰팡이 슨 주사파(主思派) 말고는 없다. 북한의 질서있는 해체를 추진하려 해도, 돌연한 붕괴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하려 해도 동북아 국가 간의 2중·3중의 협력체제 구축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대통령 지망생들 얼굴에서 그런 고민의 흔적을 읽은 기억이 없다.

    국제 신용 평가사 피치가 지난 22일 일본의 국가 신용등급을 'AA'에서 'A+'로 두 단계 낮췄다. 사상 최초로 일본 신용등급이 한국·중국·대만과 같아졌다. 세월 앞에선 한 나라의 발흥(勃興)과 쇠망(衰亡)조차 무상(無常)하기 짝이 없다. 에즈라 보겔의 '세계 제1의 일본(Japan as No.1)'이 서점가의 베스트셀러였던 게 1979년, MIT 교수들이 위원회를 구성해 일본에 밀려나는 미국 산업계의 반성문 'Made in America'를 내놓은 게 1989년이었다.

    그러나 1990년 새해가 밝자마자 일본의 주식시장과 자산시장은 수직(垂直)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정반대 책들이 세계 책방의 점두(店頭)를 장식했다. 2000년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 마이클 포터의 '일본이 과연 해낼 수 있을까(Can Japan Compete)'가, 2006년엔 일본의 대표적 저널리스트 다치바나(立花隆)의 '멸망해가는 국가 일본'이라는 한탄 소리가 화제로 떠올랐다. 그 종합판이 일본의 경제·사회적 쇠락(衰落)을 가져온 주범(主犯)이 바로 일본 정치라고 지적한 일본 전문가 제럴드 커티스의 '일본 정치의 논리(The Logic of Japanese Politics)'다.

    눈을 감고 있으면 달리는 기차 안에 앉아서도 기차의 속도를 가늠할 수 없다. 창밖으로 쏜살같이 멀어져 가는 바깥 풍경이 속도계(速度計)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바깥을 내다봐야만 세계 변화가 보이고 대한민국의 적정(適正) 주행 속도를 계산해낼 수 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세계로부터 눈을 돌려선 안 된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국민을 향해 '세계'를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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