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현의 모던타임스] [10] 여운형 딸 "아버지는 종파분자들이 암살했습니다"

조선일보
  • 허동현 경희대 교수·역사학
    입력 2012.05.24 23:11

    1946년 2월 중순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결성될 때 밀담을 나누는 여운형(오른쪽)과 박헌영. 사회민주주의자에 가까웠던 여운형은 골수 공산주의자였던 박헌영과 앙숙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일보 DB

    광복 후 혼란기, 정객(政客) 중 가장 많은 테러를 당한 사람은 12번을 겪은 여운형이었다. 그러나 그 배후는 명확히 밝혀진 바 없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일어난 암살 사건도 예외는 아니다. 경찰은 사건 발생 사흘 뒤에 우익 비밀결사 백의사(白衣社) 소속인 19세의 월남 청년 한지근을 저격범으로 검거했다. 남로당은 그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고 '몽양을 암살한 우익 진영'에 복수를 다짐했다. 세상을 적과 우군으로 준별하던 시대에 자녀를 소련에 유학 보내고 북한을 5차례나 다녀온 중도좌파 여운형은 극우 세력 손에 희생되었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냉전 종식 후 소련 측 기밀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나는 박헌영에게 심한 모욕을 느꼈다. 백남운(신민당 당수)은 나에게 야유조로 공산주의자들이 나를 정치적으로 강간했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공산주의자들 손안에서 농락거리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여운형이 1946년 6월 방북 때 스티코프 소련 군정사령관에게 토로한 바와 같이, 박헌영에 대한 여운형의 증오는 생각보다 컸다. 암살 넉 달 전인 1947년 3월 여운형 자택에 가해진 폭탄 세례도 남로당 소행으로 여길 정도였다. 두 달 뒤인 5월 여운형이 근로인민당을 만들어 좌우 합작에 반대하는 남로당과 갈라서자, 남로당 간부는 소련에 보낸 보고서에서 "여운형은 반동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남로당과 투쟁하고 있다"고 비난할 정도로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미 군정은 남로당과 결별한 여운형을 공산 세력에 역공을 가하는 카드로 활용하려 했다. 암살 당일 여운형은 미 군정이 제의한 민정장관 자리를 받아들일 예정이었다. 공산 진영이 '장식용 황금 도끼'라고 조롱했던 여운형이 그들의 심장을 겨누는 비수로 변할 공산이 컸던 날, 그는 미 군정 민정관 존슨의 집으로 가던 중 흉탄에 맞았다. 여러 정황상 여운형과 좌익 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날카롭게 경쟁하던 박헌영이 암살을 주도한 배후였을 가능성을 지적한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의 학설이 설득력을 얻는다. 이 교수가 1981년 방북 때 여운형의 차녀 여연구에게서 들었다는 "부친 암살자는 종파분자였다"는 말이 귓가에 맴도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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