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대한민국 스승상’ 첫 수상자, 김화연 교사

조선일보
  •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12.05.14 03:10

    “문제학생도 그 나이의 학생일뿐… 폭력배 소탕작전처럼 해선 안돼”

    “새벽마다 짐자전거 타고 두부공장에서 두부를 떼와 날 대학 보내려고 가족이 희생”

    17년간 학생생활 지도 업무 학생이 ‘왜요?’ 대꾸하면 교사는 ‘어, 반항해’라고 생각

    서울 마포구 동도중학교로 가면서, 김화연(51) 교사가 수문장(守門將)처럼 딱 버티고 서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제1회 대한민국 스승상' 수상자다. 교육과학부와 교직원공제회에서 제정한 이 상(賞)에는 교사 열 명이 선정됐다. 유독 그의 공적 사항에는 '교사들이 기피하는 학생 생활 지도 업무 17년'이 들어있었다. 나는 오래된 과거를 떠올렸다. "학생 지도 선생님이면 교문에서 야구 방망이를 들고서 두발과 복장이 불량한 학생들을 잡았지."

    하지만 그를 찾아낸 곳은 자신이 담임을 맡고 있는 3학년 교실에서였다. 그는 수업을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복도 창문으로 보니 작은 체구였고 웃는 얼굴에 큰 안경을 꼈다. 별명은 '깃털도사'. 단체 사진을 촬영할 때 학생들이 그의 머리를 축구공으로 때리는 듯한 장난까지 쳤다.

    김화연 교사는 "나도 고교시절 문제아여서 문제 학생 지도를 포기한 적 없었다"고 말했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내가 생각했던 '베테랑' 학생 지도 교사는 영 아닌 것 같다.

    "젊었을 때는 나도 오전 7시부터 교문에 서서 교복 불량자는 되돌려보냈다. 학생들에게 엄격했고 감정이 욱할 때도 많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달라졌다. 지도 방법을 바꿔나간 것이다."

    ―왜 달라지고 바꿔나갔나?

    "뭐 특별한 교육 철학이나 이론이 있는 게 아니다. 학생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생활 지도 효과가 있지 않나 생각했다. 강압적으로 하면 잠깐 행동은 바뀌지만 마음은 안 바뀐다. 반발만 키운다."

    ―교직 생활 21년 중 17년을 학생 생활 지도 업무를 맡았다. 교사들이 가장 어려워하고 기피하는 업무라고 들었다.

    "중소기업에서 영업과장으로 근무하다가, 내 어릴 때의 꿈인 교사가 됐다. 같은 재단인 야간 공고(현 서울디자인고)에 첫 발령을 받았다. 야간고니까 밤중에 학생들을 찾으러 다니는 일이 많았다. 경찰서에 잡혀있는 학생들을 데려와야 했고. '기동력이 있는 선생이 필요하다'며, 내가 승용차가 있다는 이유로 학생 생활 지도 업무를 맡아달라고 했다."

    ―순전히 승용차가 있다는 이유로?

    "그때(1991년)만 해도 승용차 가진 선생님이 얼마 안 됐다. 그게 이유였다. 내가 영업 쪽에서 일했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는 걸 좋아했다. 그 뒤로 다들 '체질'이라고 해서, 보직 이동이 거의 없었다."

    ―피해 학생이 자살하는 등 학교 폭력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됐다.

    "요즘 학생들은 상처를 받으면 스스로 치유가 안 된다. 예전에는 형제가 많으니까 싸우고 양보하고 억울한 것도 감수하며 자랐다. 어느 정도 심적 부담은 스스로 견뎌낼 수 있었다. 이제는 그런 경험이 없으니 감당을 못 한다. 정신적으로 나약해졌다고 할 수도 있다."

    ―대부분 학교에 폭력 서클인 '일진회'가 조직돼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여론이 시끄럽자 정부에서 '학교폭력대책위원회'를 구성했는데, 학생을 지도하는 교사로서는 좀 안타깝다. 마치 폭력배 소탕 작전을 하는 것처럼 비친다. '일진회'가 문제가 있다 해도 이를 '범죄 단체'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문제 학생이라 해도 그 나이의 학생으로 봐야 한다."

    ―그 나이의 학생으로 봐야 한다는 뜻은?

    "신체적으로 발육이 되고 비행(非行)을 저질러도 아직 어리다. 어른보다 여러 면에서 부족할 수밖에 없다. 또래 학생 앞에서 힘을 과시하고 폼을 잡고 싶어하지만, 다른 마음 한편에는 보호받고 관심을 받고 싶어한다. 매스컴에서는 학교 폭력이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가는 추세라고 하지만, 대부분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학교 폭력이 해결될 수 있다고 보나?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우리 학생 시절에도 교내 폭력 서클이 외부 폭력 조직과 연결돼 있었다. 하지만 학교 안에서는 안 괴롭혔다. 학생회 조직에도 맞서지 못했다. 이제는 학생회가 약해졌고, 보이스카우트나 걸스카우트, RCY 등은 명맥만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학생들이 소속감을 갖고 규율을 배울 수 있는 단체 활동이 필요하다. 그런 게 없으니 '일진회'에 잘생기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까지 가입한다는 말이 나온다."

    ―요즘에는 교사도 문제 학생을 지도하다가 욕설을 듣고 봉변을 당한다.

    "선생이 학생에게 맞아 실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광경을 보면 속에는 열불이 난다. 나도 사람인데. (머리카락 속을 들춰 보이며) 원형탈모증이 생겼다. 문제 학생은 있다. 하지만 학생을 지도하는 방법에도 문제가 있다."

    ―어떤 문제를 말하는가?

    "통상 학생들은 지적을 받으면 '왜요?'라고 대꾸한다. 교사 입장에서는 '어, 이 녀석이 반항해' 하고 생각한다. 그런 학생에게 '야, 너 부모가 그렇게 가르쳤어? 누굴 닮았나? 너 엄마를 닮았어?' 하는 식으로 자존심을 건드린다. 교사는 감정적이 되고 학생도 막가게 된다."

    ―폭력 학생에 대해 교사가 겁내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학생들을 이해 못하니 겁을 내는 것이다. 젊었을 때는 학생의 언행에 '이 녀석이 감히" 하고 반응했지만, 나이가 들면 '이 아이가 왜 그런 행동을 할까'를 생각한다. 학생들의 마음을 아는 게 중요하다."

    ―지방의 한 고교 강당 앞에서 남녀 학생 30여명이 모여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보도됐다. 그 자리에 '선생님'은 없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명감이 약해지고 직업인 역할만 담당하겠다는 교사들도 생겨났다. 학교 폭력 문제가 불거지면서 자기 방어적이 된다. 지시에 의해 수동적으로만 따라간다. 그럼에도 학교의 문제는 상당 부분 교사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

    ―도저히 말이 안 통해 학생 지도를 포기할 때도 있지 않겠나?

    "점심시간에 교직원 식당보다 훨씬 자주 학생 식당에서 나는 밥 먹는다. 방과 후에 학생들과 함께 고기를 구워 먹으며 노는 '뒤뜰 야영'이라는 것도 했다. 반(班)별로 1박 2일 야영을 간다. 이런 유대 관계가 생기면 문제 학생을 지도하기 어렵다고 포기하지 못한다. 나도 고등학교 다닐 때 반항아고 문제아였다. 하지만 선생님들이 잘 타이르고 지도해줘서 지금 학교 선생을 하고 있다."

    ―문제 학생들을 어떻게 설득하나?

    "구태여 설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같이 텃밭에서 작업한 뒤 '집에 갈 때 채소를 좀 뜯어가라'고 한다. 아이들은 자존감을 갖게 된다. 나중에 찾아와서 '뭐 일할 것 없습니까?' 하고 묻는다. 함께 있어 주는 것만 해도 아이들에게는 힘이 된다. 문제 학생은 마음 둘 데가 없는 학생이다."

    ―마음 둘 데가 없다는 게 무슨 뜻인가?

    "주변에서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마음이 의지할 데가 없다. 자신이 소외됐다고 느낀다. 특히 결손 가정 학생들이 그렇다. 집에도 잘 안 들어가고 학교에도 안 나온다. 그런 아이의 집에 라면을 사 갖고 가서 같이 끓여 먹었다. 그런 뒤 벌렁 드러누워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아이가 '아버지는 술 마시고 들어오면 만날 때렸다'며 마음에 담아둔 걸 털어놓는다. 그때부터는 집에는 안 들어가도 학교에는 꼭 나온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첫발령 받은 야간 공고에서 담당 학급을 '무결석 학급'을 만들었다고 들었다.

    "당시 수준이 가장 떨어진 야간 공고였다. 학업 성취도가 낮으니 결석이 다반사였다. 야간부 수업 시작은 오후 3시 반이었다. 나는 '오후 1~2시쯤 등교해라. 나와서 같이 놀자'고 했다. 바깥으로 같이 구경 다니기도 하고, 운동장 구석에서 함께 버너를 피워 라면을 끓여 먹기도 했다."

    ―정시에 등교하면 되지, 왜 일찍 나오라고 했나?

    "못사는 동네에다 결손 가정이 많았다. 어떤 학생은 생계 때문에 밤늦게 소주방이나 편의점에서 일하기도 했다. 대부분 집에서 낮잠 자다가 늦으면 아예 빼먹어버린다. 그래서 내가 정해준 시간까지 안 나오면 전화를 걸어본다. 안 받으면 내가 직접 집으로 찾아갔다. 텅 빈 집에서 혼자 잠자고 있다."

    ―그런 학생들을 집까지 찾아가 깨우면?

    "그때만 해도 학생들이 말을 잘 들었다. 내가 찾아가면 '죄송합니다' 하며 바로 차에 올라탔다. 집까지 찾아오는 선생님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학교 출석 자체가 교육이다. 야간 공고 나오면 대부분 취업을 했다. 직장에서도 근태(勤怠) 상황이 중요하다. 학교에서처럼 조금 피곤하다고 지각 결석하면 당장 다음 날 쫓겨난다. 내 과목인 정치·경제를 가르치는 것보다 출석시켜서 같이 놀아주는 데 신경 썼다. '열심히 학교에 잘 나와서 나중에 출근을 잘 해라'는 게 그때 내 바람이었다."

    ―같이 놀아줬다고 했나?

    "야간고에서 수업을 진행하면서 학습 능력 향상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교과서를 펼치는 순간 아이들은 공황 상태에 빠진다. 이 때문에 1년 내내 교과서를 안 편 적도 있다. '공책만 꺼내라. 내가 그냥 얘기를 해주마. 다만 칠판에 쓰는 내용은 꼭 적어라. 너희가 사회에 나가면 상식이 된다. 시험도 여기서만 나온다'고 말한다. 얘기를 하면서 교과서 내용을 담았다. 수업이라는 느낌을 안 주려고 했다."

    ―경찰과 검찰을 찾아다니면서 비행 학생들을 인계받으면 졸업만은 꼭 시켰다고 들었다.

    "나도 자라온 환경이 몹시 어려웠다. 그 시절 생각이 났다. 졸업을 못 한 아이에게는 다른 기회마저 없어진다. 이때만 잘 견뎌내면 다음에 진로(進路)가 열릴 수 있다. 학생들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은 못 돼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런 관심뿐이었다."

    ―학창 시절이 어떠했나?

    "어머니가 시장에 앉아 두부를 팔았다. 나는 새벽마다 짐 자전거를 타고 두부 공장에서 두부를 떼왔다. 어머니가 3남 4녀를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했겠나. 나를 대학 보내기 위해 위의 두 누님이 희생했다. 내게는 옥상에 합판을 붙여서 공부할 공간을 마련해줬다. 나는 주변의 모든 분의 고마움을 간직하며 자랐다."

    ―직장에 다니다가 교직으로 옮긴 이유는?

    "원래 교직이 꿈이었지만, 교사는 박봉(薄俸)이라며 부모가 반대했다. 그러다가 직장 생활 4년 만에 내가 원하는 길을 택했다."

    ―어떤 선생님이 되고 싶었나?

    "학생들에게 꿈을 줄 수 없을까, 좀 더 행복하게 살게 해줄 수 없을까,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할 수 없을까. 꿈이 있다면 힘들어도 그 시기를 즐겁게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졸업한 제자들이 연락해올 때다. 과거에는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해서 밥상을 차렸다. 요즘에는 음식점에서 만나고 제자들이 갹출한다."

    그는 평범한 교사였다. '대한민국 스승상'을 받았지만 혁혁한 공적 사항은 없다. 교육이란 순식간에 눈에 띄는 성과나 변화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가 동료 교사들보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학생들을 위해 '마음' 하나 더 썼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 사소한 차이가 어쩌면 학생들의 삶에 태풍(颱風)으로 불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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