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시내 20개소에 배치된 자동전화의 이용상태를 문(問)하건대, 최다는 남대문 역전의 것이니 매월에 50원이나 되고(1천통화), 그차(其次)는 본정 1정목 경성우편국 방(傍·곁)의 것과(5백~6백통화)…, 기타는 모다 매월에 십원(2백통화) 이내에 불과하다더라."(1921년 5월 9일자)
'자동전화 수입(收入)'이란 제목이 붙은 이 기사는 경성 시내에 설치된 무인 공중전화의 이용 실태를 전한 것.
무인 부스에서 동전을 넣고 거는 공중전화가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총독부 관보(1912년 12월 28일자)의 '1913년 1월 1일부터 경성 동대문 일한 와사(瓦斯)전기회사 발전소측, 경성 동대문통 2정목(총독부의원 동물원)에 이르는 곡각 등에 자동전화기를 설치'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한일병합(1910년) 직후로 추정된다.
당시 '과학'란 기사에 따르면, '자동전화기'엔 동전 투입구 2개가 있어, 5전 투입구에 해당 동전을 넣으면 '뎅그렁', 10전 투입구에선 '퐁' 소리가 났다. 이용자가 수화기를 들면 교환수가 나오고, 동전을 넣고 번호를 대면 교환수는 이 '뎅그렁' '퐁' 소리를 듣고 금액에 해당하는 시간 동안 원하는 상대방과 전화를 연결해 준다고 했다.(1925년 3월 16일자)
1925년까지 설치된 공중전화는 전 조선에 모두 65개.(6월 23일자) '여의도 경마장에 공중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임시 자동전화 설치'(1921년 9월 23일자) 혹은 여름철 '부산 송도해수욕장에 자동전화 설치'처럼(1923년 8월 2일자),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엔 임시로 가설됐다.
공중전화는 통행이 많은 곳에 세워져 "자동차 마차 등속을 벌녀노와, 혹은 류리창을 깨트리고, 혹은 기둥을 분질르고" 하는 수난을 당하기 일쑤였다. 특히 남대문 공중전화는 "마치 변소로 대용하여, 대소변을 누는 것이 한두번이 안이얏"다. 이에 체신국은 '공중도덕 방해가 발견되면 엄중 처벌'을 선언하고, 이용객에게도 "자택에서 사용하는 전화와 갓치 사용하기를" 당부하면서(1922년 12월 3일자), '공중전화 예절'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자동교환식 전화'가 등장하면서 혼동을 피하려 체신국은 '자동전화'를 '공중전화'로 개칭(1927년 6월 2일자), 비로소 '공중전화'란 이름이 탄생했다. 6·25전쟁 후 값비싼 '공중전화기'는 구멍가게 등을 운영하는 사람에게 위탁 관리되다, 1962년 10월 서울역과 서울 시청 등 7곳에 50환 주화를 넣고 이용하는 무인 공중전화가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1962년 9월 9일자)
입력 2012.05.01.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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