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반 남자들아,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라."
지난해 2학기가 시작된 직후 고교 1학년 C양의 페이스북에는 C양 본인이 쓴 것으로 돼 있는 글이 올라왔다. 대부분의 학생이 페이스북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C양은 학교 내에서 순식간에 음란한 글을 쓰는 '이상한 애'가 됐다. C양은 자신이 쓴 글이 아니라고 학교 측에 알렸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이 글을 쓴 사람은 C양이 아니었다. 같은 반 남학생이 C양의 페이스북 계정을 해킹해 글을 쓴 것이다. C양은 그 후로 대인 기피증을 겪고 있다.
매년 미국 명문대 합격생을 수십 명씩 배출하는 서울의 A외국어고등학교 유학반에서 지난해부터 지능적인 학교폭력이 일어나고 있다. 이 학교 유학반에서 일어난 학교폭력엔 '물리적 폭력'은 없다. 돈을 빼앗거나 때리는 대신 교묘한 방식으로 괴롭혔기 때문이다. 이 학교 유학반 학생들은 부모들이 대기업 임원, 변호사, 의사, 대학교수 등으로 경제적으로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다. 한 학부모는 "부족함 없이 자란 아이들이라 그런지 지능적인 괴롭힘에 더욱 큰 상처를 입은 것 같다"고 했다. 피해학생들은 학교를 그만두고, 정신과 치료를 받거나 자살 징후까지 보이고 있다.
지난 2월 중간고사에서 학생 12명이 스마트폰을 이용해 단체 채팅을 하며 '커닝'을 한 일이 있었다. 10여명의 학생이 학교 측에 항의했으나 묵살됐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학부모들이 학교 측에 항의했고, 학교는 8명을 교내 봉사란 이름으로 징계했다. 교내 봉사란 징계의 내용은 정규 수업은 듣되, 방과후 진행되는 유학반 수업 대신 다른 교실에서 자습을 3~4일 동안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후에 발생했다. 부정행위를 저지른 학생들이 학교에 사실을 알린 학생들을 찾아내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학교에선 물론 하굣길 셔틀버스 안에서까지 욕설을 퍼부었다. 사실을 알린 학생 중 한 명인 B양이 홀로 버스에 남자, 부정행위를 한 학생들은 자기들끼리 "이 얘기가 내일이면 또 누구 귀에 들어가겠지? 이게 내일 또 알려지면 그때는 그 애(B양을 지칭) 귀를 잘라버리고 아주 입을 찢어버리고…"라고 B양이 들리도록 말했다.
D양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온라인에서 조롱을 당했다. 한 학생이 인증된 회원만 들어갈 수 있는 'PWH○'이란 비밀그룹을 페이스북에 만들었다. 이 그룹은 'People Who Hate ○(○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약자(略字)로 ○는 D양의 영어 이름이었다. 10여명이 가입한 비밀그룹에는 D양을 성적(性的)으로 비하하는 글로 가득 찼다. 이 글들의 내용을 학급 친구들에게 흘리는 방식으로 D양에게 고통을 줬다. 가해학생들이 비밀그룹까지 만들어 D양을 괴롭힌 이유는 D양이 중간고사 때 일어난 부정행위를 학교에 알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0여명의 가해학생 때문에 수십 명의 학생들이 고통받고 있지만, 학부모들은 "유학반을 총괄하는 디렉터를 비롯해 학교가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E양은 지난해 말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고,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다.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이 가득한 익명의 문자를 계속해서 받았기 때문이다. E양은 피해 사실을 학교에 알렸지만 "그냥 참고 넘기라"는 말만 돌아왔다. 비슷한 피해를 본 H양은 결국 전학을 택했다.
학부모 10명은 지난 3월부터 교장에게 계속해서 항의했다. 학생들의 피해 사례를 직접 모으기도 했다. 학부모들은 가해학생들의 징계뿐 아니라 유학반을 총괄하는 '디렉터'의 교체를 요구했다. 일반 학교에는 존재하지 않는 직책인 디렉터는 유학반 프로그램 전반을 책임지고, 미국 학교에 지원할 때 추천장을 작성하는 역할을 한다.
한 학부모는 "피해를 당한 학생들이 제일 먼저 디렉터에게 도움을 청했는데도 학부모에게조차 사실을 전하지 않았고, 폭력적인 학교 상황을 묵인하기만 했다"며 "학부모의 돈으로 디렉터의 월급(연봉 1억 6000만원)이 나가는데 학교는 디렉터의 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12일 학부모 3명, 변호사 1명, 교감 등이 참여한 가운데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가 열렸다. 학생들이 공통으로 지목한 가해학생 12명의 징계가 위원회에서 논의됐지만, 4명에 대해서만 '3주 내 강제전학' 결정이 내려졌다. 가해학생으로 지목돼 강제전학 결정이 난 한 학생은 세계 모의법정대회 한국 대표로 출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본지는 이 외고 교장·교감의 입장을 듣기 위해 수차례 전화를 걸었으나 "회의 중이다", "자리를 비웠다"는 말만 돌아왔다.